
공리에 치중 인성교육 소홀탓
가르치는 일 '敎鞭'이라 하는데회초리를 든다는 뜻
교육은 큰 사랑 전제로 이뤄져야
믿음 주는 스승·부모 역할 중요
교사가 아들을 때렸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폭언을 하고 담임교사를 폭행한 학부모가 구속됐다고 한다. 이런 일이 어쩌다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과연 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학교는 필요하기나 한 것인가. 이제 교육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2010년 진보성향의 교육자들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 학생들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서울 동작구 한 초등학교 교사의 폭행 장면이 담긴 동영상과 피해 학생들의 증언이 나와 파문이 일었고 6학년 담임교사는 직위해제 되기에 이르렀다.
학생인권조례도 필요하겠지만 교권조례도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다. 아니 어린 학생들의 미래를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교권부터 바로 서야 할 것이다. 언론에 의하면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잠을 보충하고 상쾌하게 학원에 간다고 한다. 학교가 황폐화되고 믿을 만한 교사가 없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있겠는가. 자기 자식이 최소한의 윤리나 기강도 무너진 학교에 다니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정이 먼저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읽은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의 글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기도 어린이지만 요즘 애들이 너무 예절을 지키지 않아 한 마디 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 학원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안에는 다른 어린이와 부모가 같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어린이가 자기네 집인 양 하도 쿵쾅쿵쾅 뛰는 바람에 짜증스러웠지만 아무 말도 못했으며, 거기서 그 어린이의 부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공리(功利)교육에 치중하면서 인성교육을 소홀히 한 결과이다.
전통적인 서당교육을 보자. 서당에도 여러 유희학습이 있고 가마싸움 등 집단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루는 아이 셋이 놀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떡 네 개를 주면서 똑같이 나눠 먹으라면서 떠났다. 어떻게 나눠 먹어야 하는가가 문제다. 하나씩 나눠 갖고 남은 하나까지 삼등분해서 나눠 먹으면 된다. 하지만 훈장은 그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가까이 들판에 서있는 작은 돌부처와 넷이서 하나씩 나눠 먹는다는 것이 정답이란다. 놀이도 남을 배려하는 인성교육과 연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인성교육에 치우치다 보니 실용교육이 도외시되었던 점 등의 부작용도 있었다.
교육은 큰 사랑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선 실학자 이덕무가 어린이의 본성과 좋아하는 취미 등을 함부로 막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침내 이덕무는 스승의 자질을 문제 삼아 아이들의 입장에서 인품과 지혜 없이 지식과 재주만 뽐내는 자를 스승으로 삼지 말기를 충고하고 나섰다. 이율곡이나 정다산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에 앞서 부모로서의 자식 사랑을 먼저 언급한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잘해주기는 쉬워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체벌을 없애야 한다는 이름 아래 사랑의 매까지 증발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대 희랍 스파르타의 축제일로 '회초리 치는 날'이 있었음을 상기하게 되는 것도 내 자녀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진정한 우려 때문이 아닌가. 수원의 모 고교는 학원에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딱 부러지게 공부를 시키고 생활습관도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로 알려져 있다. 학부모들은 학년 초에 떡매 수 십 개를 손수 만들어 학교에 전달한다고 한다. '떡매'는 엄격한 생활지도를 상징하는 수성고의 전통이다. 가르치는 일은 '교편(敎鞭)'이라 하는데, 회초리로 든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고 큰 걱정이다. 문제는 배우는 아이들이 아니라 '철없는 어른들'이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든 스승과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교육은 신뢰에서 출발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믿음, 동료 교사 간의 믿음, 학부모와 학교 간의 믿음이 없으면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이화형 경희대 중앙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