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북쪽세력 침입에 대비한
특수 군사지역으로 설치된후
예성강 이북지역은 한주에서
떨어져나가 별도 관할 통제
헌덕왕대 이후엔 패서도라는
독립된 구역으로 편재


오늘날 경기도 지역은 신라시대 한산주(한주)에 속했다. 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예성강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라는 북쪽의 발해와 서로 국경을 맞닿게 되어, 발해의 남하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었고, 더구나 8세기 초반의 잦은 자연재해로 농민들의 몰락과 유망이 증가하면서 국가의 재정수입이 감소하여 새로운 지역 개척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패강 이남 지역은 비교적 넓은 평야를 이루는 곡창지대였고, 또 신라국가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몰락한 농민들이 일찍부터 많이 유입되었다. 이 지역에 대한 개척사업은 수취 대상의 확대, 즉 국가재정의 수입 증대와 직결되었다. 신라는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 인정받음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을 본격화하게 되었다. 736년 윤충 등 대신들을 파견하여 평양(한산주)과 우두주의 지세를 검찰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북방개척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748년(경덕왕 7) 대곡성(평산군) 등 14개 군현을 설치하고, 762년 멸악산맥에 인접한 오곡성 등 6곳에 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고 각각 태수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개척사업을 계속 전개하여 헌덕왕대에 취성군(황주)과 그에 속하였던 토산현(상원), 당암현(중화), 송현현(송현)을 더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주조에 기록된 28개 군과 49개 현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모두 영토로 편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북방개척은 발해의 남진을 저지하고 패강 이남 지역을 군현으로 편제하여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대시키는 방향에서 진행하였던 바 당연히 군현 설치와 더불어 이 지역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군사적 거점의 확보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당시까지 한산주에 설치된 군사 조직들은 모두 한강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 개척한 지역을 북방세력으로부터 방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신라의 중앙정부는 781년 사신을 파견하여 패강 이남 군현의 민심을 안정시킨 다음, 782년(선덕왕 3) 왕이 직접 한산주를 순행하고 이 지역 백성들을 패강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것은 패강지역에 새로운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782년 대곡성에 진을 설치하는 것으로 구체화되고, 드디어 패강진을 설치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때 설치된 군현은 모두 한(산)주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패강 이남지역까지 한산주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패강진이 설치된 이후 한산주 관내에는 829년(흥덕왕 4) 화성시 남양면에 당성진을, 844년(문성왕 6) 강화도에 혈구진을, 그리고 장산곶 근처에 장구진을 설치하였다. 한산주 관내의 이들 진들은 모두 해상교통상의 요지였다. 중국에 신라 사신과 유학생, 구법승 등을 파견하거나 해상교역에서 이들 진은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중간 기항지거나 최종 기착지였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서해안에는 해적이 빈번하게 나타나 신라인들을 잡아가 중국에 노비로 팔거나 해상교역을 방해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 서해안의 치안상태가 불안하자 신라 정부는 안전한 해상교통을 확보하고 해상무역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들 진을 설치한 것이다. 북쪽 세력의 침입에 대비한 특수 군사지역으로 패강진이 설치된 후에는 예성강 이북지역은 한주에서 떨어져나가 별도로 관할, 통제되었다. 헌덕왕대 이후에는 패서도라는 독립된 구역으로 편재되었다. 그 결과 한주는 관할 영역이 675년(문무왕 15) 단계의 범위로 축소되었고, 이것이 뒷날에 행정구역 황해도와 경계선의 기초가 된 것으로 보겠다.

한편 9세기 후반에 패강진의 장관은 군사적으로 관할하던 지역의 민정권도 함께 갖게 되었다. 더욱이 전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으로 지방 통치체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패강진 군관들은 진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막강한 지방세력가로 변하였다. 왕건 집안이 혈구진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호족으로 발전하였듯이, 패강진 지역에서 성장한 군진세력들이 고려 건국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