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자. 대기업 상무와 제빵회사 사장은 과연 갑인가. 앞에 잠깐 언급했듯이 공교롭게도 라면사건이 일어난 비행기 회사나 호텔은 우리나라 10대 재벌에 들어가는 회사들이다. 단 한번도 '을'일 수 없는, 늘 '갑'의 위치에 있었던 회사인 것이다. 이면에 비행기 안에서 라면 한 그릇을 시키는 바람에 험한 꼴을 당했던 대기업 상무는 비행기를 타기 한달여 전 상무로 승진했다고 한다. 어쩌면 상무로 승진한 후 첫 외국출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장시절에도 출장은 다녔겠지만 아마도 부장 신분으로는 사내 규정상 라면을 끓여주지 않는 이코노미석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상무 승진 후 첫 해외출장에 비즈니스석을 탔을 터이고 과연 말로만 들었던 비즈니스석에서 라면을 줄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처음 먹어본 라면이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새로 끓여달라고 요구했을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다보니 승무원 입장에서 약간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언성을 높였을 것이고 급기야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빵회사 사장도 마찬가지다. 한번 이런 가정을 해보자. 호텔에서 바이어 상담이 있었는데 그는 교통체증 때문에 늦었다. 겨우 호텔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꽤 흘렀다. 아주 중요한 상담인데 주차가 문제였다. 기사를 데리고 오지 않은걸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주차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때 호텔직원이 다가와 차를 다른 곳으로 빼달라고 했을 것이다. 굉장히 정중하게 90도로 절을 하고 빼달라고 했는지 수신호로 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호텔은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이 운영하는 호텔이다. 제빵회사 사장 입장에선 여러가지로 차를 뺄 수 없는 변명을 했을 테지만 별이 다섯개인 최고급호텔 직원과 언성이 커지고 결국 지갑으로 지배인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대기업 상무나 제빵회사 사장은 쉽게 용서할 수 없는 큰 실수를 한 것이 맞다. 이 두사람을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의 입장이 돼보자는 것이고 과연 그들이 '갑'인지 생각해보자는 거다.
이 두사건을 계기로 '갑'에 억눌리며 살았던 '을'의 소리가 점차 커질 것이란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어느 정신과의사는 TV에 나와 이 사건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을'의 소리가 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빵회사 사장, 대기업 상무라는 직위만으로 갑이 된다는 것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본의 아니게 이번 사건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던 항공사, 호텔 즉 늘, 언제나, 항상 갑이었던 두 재벌회사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번 사건을 보는 일반인들이 제빵회사 사장과 대기업 상무에 대해 '돈 좀 있다고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설쳐대는 돈벌레 쓰레기들은 소비자의 힘으로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라는 섬뜩한 구호가 인터넷 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떠돌아 다니는 게 더 무섭다. 그들도 소비자인데 말이다. 그걸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도 문제다. 도대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