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도서관 관련 검색을 하다보니 '걸어다니는 도서관'사업을 확대한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새로운 방식의 이동도서관으로 지레짐작했는데 실은 주민들이 집에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마을 도서관을 건립하는 사업이었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 아니라 '걸어서' 다니는 도서관이었다. 요즘말로 '낚인' 셈이다.

진짜 '걸어다니는 도서관'은 노인들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진 것이다"라는 소말리아 속담이 있다지 않은가? 노인을 도서관에 비유한 소말리아 속담은 사람이란 사람에게 배우고 사람에 기대어 산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만든다. 사람이야말로 지식과 지혜의 원천인데, 갑년(甲年)을 넘기고 살아온 분들이 온축한 경험과 지혜야말로 생생한 책이다. 꼭 공부를 많이 한 박식한 노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도서관'이라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평범하게 살아온 분들의 삶과 경험도 소중하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아온 분들의 삶과 꾸밈없는 이야기가 오히려 감동적인 경우가 많다.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갈등의 조정자요, 난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였다. 설화 속의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했을 경우 '수염이 허연 백발 노인'이 나타나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경우가 많다. 마치 일상생활에서 할머니가 만능해결사였듯이. 지혜의 상징이었던 노인에 대한 존경이 급격히 옅어진 것은 농경 공동체가 해체되고 성장 만능주의사회로 바뀐 탓이다. 노인 대신 '어르신'이라고 부르자는 제안이나 고령(高齡)이라는 대신 '실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기실 노인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사이 '욕망의 도시'에서 중요한 성찰의 흐름이 일고 있다. 투자의 수단으로 여기던 집과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땅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만들어 보려는 움직임이다. 아직은 침체된 부동산 경기 때문에 재개발의 대안으로 선택한 고육지책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서의 마을의 문제를 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하고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해가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마을 공동체 회복 과정에서 이야기꾼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을 이야기꾼은 마을이 변해온 이야기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음유시인이다. 한 마을에 오랫동안 살아온 분들, '걸어다니는 도서관'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마을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축제나 문화행사를 기획할 수 있다.

이야기는 서로 다른 세대가 대화하는 마당이 될 수 있다. 핵가족화로 인해 대부분의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생활해보지 못하고 자란다. 이들은 부모세대의 지혜에만 의존해야하니 생각이나 간접체험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마을 단위로 기획해서 추진해봄직하다. 도시 곳곳에 어른들의 이야기가 꽃핀다면 그곳은 '마실'이 된다. 이런 이야기 프로젝트는 아이들에게 사유와 경험의 폭을 넓혀 줄 뿐만 아니라, 꼭 동화책이나 설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구술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직접 보고 체험한 이야기도 재미있는 이야깃 거리이다. 우리말의 특성에 맞는 생활 언어를 익히게 하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의 리듬은 사실 민요의 가락과 같다.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분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같은 구술채록사업은 지자체 단위별로 추진해야 한다. 광역시도는 광역시도, 기초 자치단체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과 별개로 마을 단위에서 진행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집안 어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걸어다니는 도서관'들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 이야기를 기록하는 구술채록 사업, 이야기를 편찬하는 마을지(誌) 사업이 마을마다 이뤄졌으면 좋겠다.

/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