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톤 숄츠 코리아컨설트 대표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인에 대해 받은 첫 인상은 매우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었다. 불과 삼사십년 전에 전쟁과 가난에 힘들어하던 나라에서 아시아 강국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눈부신 급성장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특히 천연자원이 펑펑 쏟아져 나와 부국이 된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경우이다. 한국의 성공은 힘든 노동이 불가피하다면 어떤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강인함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러한가?

그동안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한국을 일으켜 세웠던 이전 세대와 달리 앞으로 이끌어갈 세대는 전과 같지 않다. 젊은이들에게 전에 없던 게으름을 목격하면서 앞으로 한국의 위상을 지켜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특히, 늙은 용이 깊은 잠에서 다시 깨어난 듯 과거의 위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중국의 급부상을 본다면 이런 노파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해가 진 후에도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고층 빌딩가의 사무실에선 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로 불이 꺼지지 않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감히 게으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한국에서 '오래 일하는 것'은 종종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고 싶은 내용은 왜 한국인들이 그렇게 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과거 한국은 성공에 굶주려 있었다. 그러나 한 이십년 전부터 등장한 신세대들은 빈곤에서 오는 어려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 않는 듯하다. 부모들은 아이의 안녕을 추구하며 결국 응석받이로 키우고 있는 셈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 종종 볼 수 있었던 어처구니 없던 광경 중의 하나가 3층 밖에 안되던 건물 안 승강기 앞에서 학생들이 겹겹이 줄 서 있던 모습이다. 서둘러 계단으로 가면 그나마 지각은 면할 수 있을텐데도 지각을 하더라도 덜 걷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함께 등산을 하기로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보면 학과 학생 대부분이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전에 점심을 사겠다고 학생들에게 제안을 하면 처음 듣게되는 질문은 "하이킹 대신 바로 점심 먹으러 가면 안되나요?"라는 것이다. 분명 과거에는 달랐을 것이다. 지금도 산에 오를 때면 한국을 일으켜 세웠던 전세대의 어르신들이 육체적으로도 얼마나 강한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큰 보폭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길을 힘차게 오르고 내려가는 이들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에게는 주차장이 없는 카페나 식당은 안될 말이고 어디를 가더라도 십미터 이내의 주차장은 기본이며 발렛 파킹과 같은 대리 주차 서비스를 먼저 찾는다. 그러니 학생들에게 한 백미터가 좀 넘게 걸어보자고 했던 것은 분명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구미에 부응하기 위해선지 한국인은 세계 최고의 서비스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한국 내에서는 돈만 내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젊은이들의 결혼은 점점 더 늦어지고 서른살이 넘어서도 경제적 어려움 없이 부모님의 집에서 의지해 살고 고통과 고난을 이겨가며 힘들게 모은 부모의 돈과 자산에 의존해 살더라도 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부모로부터 받는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어쩌면 앞으로도 늘 그렇게 편히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일까?

한국은 위험한 교차로에 서 있고 일이나 돈에 대한 가치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갖고 있던 돈이 다 없어졌을때 지금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은 곤두박질 칠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경제력을 움직여 왔던 추진력은 타고난 창조 능력과 같은 재능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라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태도로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부모가 더 이상 곁에 있지 않는 상황을 신세대가 직면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를 축적해 가는 길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 과정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욱 더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안톤 숄츠 코리아컨설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