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수 중앙대 교수·문학평론가
'백석'의 가난함 표현은 흰색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순백의 이미지를 가난에 부여
물질적 궁핍을 의미한게 아닌
착하고 정갈한 영혼을 따돌린
세상에 맞선 그의 삶 태도였다


물질적 풍요가 지배하는 소비사회에서 가장 많이 변한 개념 중 하나가 '가난'일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대개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경제 위기를 겪으며 우리 사회는 가난이라는 상태에 게으름이라는 가치를 빠르게 덧씌워 버렸다. 90년대 후반 생태주의의 물결에 힘입어 '자발적 가난'이라는 가치가 칭송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부(富)를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와 함께 가난에 부정적 가치가 덧붙여지고 있다. 가난은 불편한 것이긴 하지만 결코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던 시절, 설사 그것이 정당한 부라 해도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님을 절로 알던 시절로부터 우리 사회는 꽤 멀리 온 것 같다. 최근에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을에 대한 갑의 횡포도 경쟁이라는 가치를 비정상적으로 추구하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어렵게 성취한,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의 소중함을 우리 사회가 너무 쉽게 폐기처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물어봐야 할 때이다.

우연히 중산층의 기준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비교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비교 대상 국가 중에서 한국 사회만이 경제적인 지표로 중산층을 판단하고 있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경제적인 지표만을 중시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말로만 다양성을 부르짖을 뿐 경제라는 획일화된 가치 기준이 지배하는 사회는 또 다른 파시즘에 불과할 것이다. 자연을 닦달하듯 사람을 쥐어짜고 경쟁을 부추기는 것으로 성장의 동력을 삼아온 기업식 성장은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 몸을 유연하게 바꾸지 못한다면 딱딱한 몸에 갇혀 우리는 고사할지도 모른다. 일찍이 알란 파커 감독이 '핑크 플로이드의 벽'이라는 영화에서 그린 것처럼 똑같은 복장과 자세를 하고 컨베이어 벨트에 오른 아이들이 똑같은 모양의 소시지가 되어 나오던 충격적인 장면을 또 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를 물려줘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문득 가난을 노래한 시인들의 면면이 떠오른다.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시인 백석과 이용악은 일찍이 가난을 노래했다. 백석의 시에는 유독 '가난한 나'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시에서 가난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남행시초' 연작시 중 한 편인 '三千浦'에서 백석은 '소'가 "기르매 지고 조"는 남쪽 시골의 나른하고 따사로운 풍경을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라고 노래한다. 가난은 온기보다는 추위와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데 백석은 '가난'함 앞에 '따사로이'라는 수식어를 나란히 놓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에도 '가난한 나'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시인에 따르면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고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선우사'). 백석이 생각한 가난함의 색깔은 흰색이었다.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순백의 이미지를 가난에 부여할 줄 알았던 백석에게 가난은 단지 물질적인 궁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량하고 정갈한 영혼을 소외시키는 세상에 맞서 그가 취한 삶의 태도였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을 선취한 시인의 직관이 놀라울 뿐이다.

실제로 지독한 가난을 체험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용악에게 '가난'은 공사장에서의 노동과 "옛처럼 네손처럼 부드럽지 못한" 손과 "주름잡힌 이마에/석고처럼 창백한 불만"('나를 만나거던')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이자 우리의 딸들과 '여인'들을 팔려가게 하는 민족의 현실을 환기하는 부끄러움이다. 이용악의 시에서 가난은 늘 상실감과 함께 온다. 가난 때문에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고, 가난 때문에 아버지를 낯선 땅에서 여의었고, 가난 때문에 처자식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이용악의 '가난한 나'가 걸어가는 어두운 뒷골목은 오늘날에도 최금진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어색한 웃음"과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웃는 사람들')로, 안현미의 '선인장 뿌리가 썩어가고 곰팡이꽃이 피는 옥탑방'('옥탑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젊은 시인들의 가난엔 지독한 현실만이 도사리고 있다. "몰려다니는 웃음"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해자일 수 있다. 자발적 가난과 공평한 웃음이라는 가치를 회복할 길은 이제 없는 것일까? 우리는 정녕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일까?

/이경수 중앙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