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지른 제암리의 불을 이제 와서 끌 수 없고, 교회안에 모였던 스물여덟명의 형제를 살려낼 수 없다.”(박목월, '제암리의 참살')
 3·1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 가운데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는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사건'.
 63년만인 지난 82년 23명의 유해를 발굴, 합동묘소를 만든데 이어 82년 만인 2001년 3월 1일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이 문을 연다.
 기독교 감리재단에서 기증한 3천여평 부지에 2개의 전시관과 시청각교육실, 예배당 등을 갖춘 기념관의 준공식을 위해 28일 30여명의 인부들은 막바지 준비로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나 제암리 이장 안용웅씨(59)는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의 하나로 추진된 제암리 기념관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암리 사건으로 증조부와 조부를 잃은 안씨는 “만세운동은 그야말로 종교와 계층을 뛰어넘는 구국운동이었다”며 “국가 차원이 아닌 종교적 차원에서 제암리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은 자칫 독립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제암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팔탄면 고주리 김연목씨(44)는 기념관 준공식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제암리 사건 직후 고주리로 넘어온 일제는 증조부의 형제와 친척 6명을 짚가리 속에 넣고 불태워 죽였다”며 “그러나 유해가 안치된 정확한 위치조차 알지 못하며, 당시 참살현장은 외지인의 땅이어서 추모비 하나 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주리 참사의 유가족으로는 김씨와 김씨의 작은 아버지(70)가 전부. 김씨는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독립운동사에서 고주리는 영원히 묻혀버리지 않겠냐”고 우려했다.
 제암리와 고주리 이외에도 당시 일제는 수원과 화성, 안성 일대에서 64개 부락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해 최소 328채가 소실되고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800여명이 검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 연구원(47)은 “기미년 3월 하순부터 6월 초까지 일제는 만세운동 주동자를 검거한다며 집단적인 탄압과 방화를 일삼았으며, 제암리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며 “이같은 연구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이뤄졌으나, 아직까지 정부차원에서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해 자칫 숱한 항일운동의 역사들이 묻혀버릴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李宰明기자·jmtrut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