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옥자 경기시민사회포럼 공동대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소위 '운동'이라는것을 하려면
내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던 시절
보안과 형사를 보고 도망쳤던
기억들이 정국이 어수선해지면
꼭 꿈을통해 의식밖으로 나온다


나는 한때 이름이 셋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촌스럽기 그지없거나 주로 기생 이름을 가진 친구들 중 가명을 쓰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 경우는 좀 다르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소위 ' 운동' 이라는 것을 하려면 내 신분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학교 내에 경찰 상주가 당연시되고, 시국 관련 이야기를 하려면 따라붙는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살펴야했고, 전화 통화 중 자그마한 소음이라도 들릴라치면 도청에 긴장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중앙정보부에서 이루어졌던 수많은 가혹 행위와 인권 탄압 소식은 국민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긴장 속에서 살도록 했고,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유지조차 특별한 용기와 안기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각오해야만 했던 시절, 본인 이름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국가영역과 시장(경제) 영역만 존재하던 그 시절, 시민사회 영역 확장과 시민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하던 사람 중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가명을 썼다. 지금 생각하면 참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로는 기관원의 눈을 속이면서 세상 일에 참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나는 세 개의 이름을 썼다. 그 후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지방정부에 직·간접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 때 내 이름 세 개가 문제되었다. 그 동안 단체활동 경력에 올라 있는 이름 '한은경'과 주민등록 이름 '한옥자', 그리고 후원금을 내던 이름 '한여해'는 동일인지, 다른 사람 3인인지 참으로 황당한 노릇이었다. 그 당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그리 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물론 무용담으로 자랑하고 싶지도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은 촌스럽다는 내 이름을 당당히 쓰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글을 통해 몸으로 저항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오늘에서 복종이 강요되고 지배만이 존재하던 그 시절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엊저녁 나는 오랜만에 다시 도망다니는 꿈을 꾸었다. 사무실 앞 2층 계단에 앉아있는 시커먼 사람을 보고 도망쳐야 했는데 발이 땅에 붙어 몸부림을 치다가 깼다. 아주 오래전 사무실 계단에 앉아있던 보안과 형사와 마주친 후 미친 듯이 도망쳤던 그 기억은 정국이 어수선해지면 꼭 꿈을 통해 의식 밖으로 나온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한창 하던 시기, 민주주의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던 2008년 소고기 파동 때 그리고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조직적으로 민간인을 미행하고, 사찰했다고 폭로되던 그 시기 내 속에 잠재되었던 권력기관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꿈을 통해 의식 밖으로 비집고 나온다.

요즘 음지에서 일해야 할 국가정보원이 연일 도마 에 오르고 있다. 대선 기간 여직원 댓글 사건은 선거 막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거리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죄없는 여성을 감금까지 했는데 그런 사람을 뽑아주면 앞으로 국민을 뭘로 보겠냐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을 보면 결국 이 일은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민주주의 작동 원리를 교란시킨 사건으로 여직원 한명의 개입이 아니라 국정원 심리정국 직원 60여명이 인터넷상에서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과거 도청, 미행을 넘어 고문, 조작을 통해 한 개인과 그의 가족을 망가뜨리고, 크게는 국민의 일상 삶을 공포에 떨게 하며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 권력이 잃어버린 과거의 그 맛을 되찾기 위해 자기 조직에 유리한 후보가 당선되도록 인터넷 세상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국정원은 자신들의 불리한 정황을 덮어보겠다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며 국정원 국기문란사건을 물타기하고 있다. 지금 정국의 끝이 어찌될지 궁금하다. 다만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해져 꿈에서나 만나는 그 세상, 이름 세개를 쓰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한옥자 경기시민사회포럼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