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아
그저 자기 말만 늘어 놓을뿐…
심지어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본인에게 유리하게 만들기도
그러고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아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다. SNS를 비롯한 개인 미디어 시대에 돌입하면서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표현의 욕구로 들끓고 있다. 권위를 지닌 전문가들의 말에 의존하던 시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개개인의 표현의 욕구가 넘쳐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는 분명 전문가의 권위에 의존하던 시절보다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상식적으로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고 하던 침묵의 시절보다 행복한 시대여야 한다. 그런데 다양성이 인정되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도 바깥의 검열이 작동하고 있고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 자기 검열에 시달리고 있다. 그 때문인지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들의 생각은 그다지 다양하지도 유연하지도 않아 보인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나와 같은 편임을 확인하기 전에는 타인의 생각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면의 진실까지 들여다보려는 숙고의 시간이 들어설 자리는 더구나 없다. 말들은 범람하는데 누구도 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급급하다. 그야말로 불통의 시대다.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리 없다. 심지어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이익에 따라 견강부회하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일단 모면하고 보자는 생각에 사태의 진실을 가리기에 급급할 뿐이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일찍이 보르헤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사고 이후 경이로운 기억력을 갖게 된 푸네스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가 모든 순간을 모조리 기억할 줄 알기 때문에 사고할 수 없음을 통찰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푸네스라는 인물은 '쓰레기 하치장'에 가까운 무분별한 정보들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비유로도 볼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야말로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의 진위와 질을 제대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일까? 우리는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에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보다는 엉뚱한 곳에 우리의 분노를 소진하고 있다. 오래 전 김수영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아프게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고 있다.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옹졸한" 우리의 "전통은 유구하"('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다.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푸른 하늘을')음을 알기까지 우리가 어떤 역사적 시간을 겪어 왔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사회적 불의와 음모에는 눈을 감으면서 한 축구선수의 투정어린 발언을 향해서는 뭇매를 가하는 현상은 기이해 보인다. 우리의 분노는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김수영에겐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는 뼈아픈 자각이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옹졸한 반항은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하던 그의 옹졸한 반항과 얼마나 다른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정말 얼마큼 작으냐……"('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고 한탄하던 김수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희중 시인의 '말빚'이라는 시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 내게 말했어야 했다". "당신들은 늘/말을 아꼈고 지혜를 아꼈고 사랑과 겸허의 눈빛조차 아꼈고/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한테도/사과와 사죄의 말 없이 침묵하였다/당신들에게 듣지 못한 말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불이 자랐다/이제 말하라, 수많은 그때 당신들이 내게 해야 했던,/그때 하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들을 흑백의 풍경으로 얼어붙게 한/그 하찮은 일상의 말들을 더 늦기 전에 내게 하라/아직도 내 잠자리를 평온하게 할 것은,/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으나 당신들이 한사코 하지 않은 그 말뿐"('말빚'). 훗날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훗날이 정녕 두렵지 않은가?
/이경수 중앙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