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형 경희대 중앙도서관장
역사에 대한 외경심이 강한
민족만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나갈것이다

최근에 왕조실록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기록이 사라졌다고 하니
우리 역사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국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역사전쟁이 한창인데 우리는 여유롭게 무장해제를 하고 있는 형국이어서 불안하기만 했다. 요즈음 들어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에 대한 전망의 능력은 과거에 대한 지식에 비례한다"고 말한 바 있다. 더구나 연일 뉴스에 등장하는 현실에서 정치인이나 기업인은 물론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 도대체 진정성이라는 게 있는가 하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무엇보다 사실대로 적고자 노력했다. 직필을 중시했던 우리의 역사관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문화, 한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일이라 하겠다. 걸핏하면 되풀이되는 일본의 교과서 역사 왜곡 사건이나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것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 등은 우리의 직필관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사실 역사서술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만을 담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는 일이다. 사실을 왜곡하여 미화 또는 폄하하지 않고 후세를 위해 그대로 적고자 했던 강한 의지 속에 우리 역사에서는 당대의 업적은 당대에 써 남길 수 없는 것이 법도가 돼 왔다.

매우 효성스러워 아버지 능 옆에 미리 자기 자리를 정해 놓기까지 했던 세종은 '태종실록'이 완성되자 한 번 보고 싶다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파란 많았던 아버지의 일대기인지라 보고 싶었음직하다. 이에 우의정이었던 맹사성은 "전하가 보시더라도 아바마마를 위하여 고치지도 못할 것이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후대의 사관들이 의구심이 들어 그 직책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할 것이니 보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또한 세종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했다고 한다. 임금은 선출된 자리도 아니고 임기가 있는 것도 아닌 종신적 절대 권력이다. 사관들은 그런 임금에게도 실록을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임금이 실록을 보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실록에 남겼다.

중국·일본·베트남 등 유교문화권에 있던 국가에서는 모두 실록을 편찬했지만 이를 후손 왕이 볼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 사관 채세영의 곁에 있던 대리승지 김근사가 사화에 연루된 조광조 등 선비들의 죄목을 대역죄로 고쳐 쓰려고 채세영의 붓을 빼앗았다. 채세영은 급히 일어나 임금이 보는 앞에서 다시 그 붓을 빼앗으며 "이것은 사관만이 쓸 수 있는 붓이다"라고 했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사초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붓을 꺾지 않았던 김일손 등 수많은 조선 사관들의 서릿발 같은 선비정신에 우리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냥을 나갔던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자 신하들에게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관은 그 말까지 실록에 기록했다고 한다.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없앨 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역사뿐이다"라고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후대의 평가에 신경을 썼다. 다만 역사를 두려워하면서도 연산군이 역사의 기록과 언론을 탄압했음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사관들의 직필에 의해서 후대의 우리들에게 그의 악정은 낱낱이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인식과 접하게 된다. 불미스러웠던 역사를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것은 당대의 불의와 부정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응징되었는지를 적어서 후세를 경계함이다.
역사를 소중히 하고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미던 외경심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게 된다. 역사에 대한 외경심이 강한 민족만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 나갈 것이다. 최근에 왕조실록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기록이 사라졌다고 하니 우리 역사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화형 경희대 중앙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