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걸 시조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
가끔 밤하늘에 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유성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 또 지도자 한 사람이 세상을 뜨는구나." 나는 혼잣말로 탄식한다. 그런 상상력은 물론 역사소설을 읽어 얻은 것도, 무협지를 통해 학습한 것도 아니다. 유년시절 어른들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그런 상상력을 갖게 했다. 여름이 되면 별식을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 식구들은 멍석이나 마루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곧잘 옛 얘기를 해주셨다. 우리는 영웅들의 얘기를 들으며 꿈을 꾸었다.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대의 아이들이었지만 그런 얘기들이 우리들에게 꿈을 갖게 했다. 삭막한 세상을 건너면서 허방에 쉽게 빠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면 그런 영웅을 닮고 싶었던 소박한 소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웅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탄생될 수 있지만 대체로 수난의 시대에 나타난다. 주권을 상실한 나라, 민권을 탈취당한 독재정권, 전쟁과 기아상태에 있거나 민족이 곳곳에 흩어진 불행한 나라, 이런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그 어둠을 헤치고 일어서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여 존경을 받게 되는 사람이 영웅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영웅의 탄생이 어려워졌다. 대체로 많은 나라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고 있고 쉽게 명분 없는 전쟁을 할 수가 없고 매스컴의 발달은 한 개인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용인하지 않고 그 내면을 낱낱이 밝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정상적인 나라의 국민들은 영웅이 출현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또 아무나 영웅이라 말할 수도 없다. 토머스 카알라일은 영웅의 조건으로 성실성과 통찰력을 들었다. 그래서 평생 갖지 않겠다는 소신을 실천한 걸인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영웅으로 인정하면서도 통찰력이 부족한 나폴레옹은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견해와 관계없이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

동서양이 인정하는 현존하는 영웅이 있다면 누가 그 호칭에 가장 적당한 인물일까? 그 답변으로 만델라를 든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할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실시한 최초의 평등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힌 만델라는 필생의 목적을 성취한 90대 중반의 유네스코 친선대사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다. 지금도 그가 남아프리카의 양심으로 존재함으로써 그 나라 안정의 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흑백차별이 지나쳤던 나라의 민주화와 안정은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경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영웅이 과연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에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민주화가 많이 진전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는 모든 국정이 시스템에 의거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충분히 그런 시스템을 운영할 능력을 가진 나라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투른 영웅적 오버액션이 나라의 평안을 깨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고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다. 적지 않은 충돌이 해마다 일어날 뿐 아니라 상대는 이제 핵으로 위협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하나같이 통일을 열망하고 있고 그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국군포로의 귀환, 개성공단의 정상화,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관광문제 등 적지 않은 현안이 쌓여 있을 뿐 특별한 묘안은 없다. 신뢰를 쌓아가면서 상호 협조해야 하지만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할 경우 좌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정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또 어떤 새로운 안으로 꾸준히 신뢰를 쌓고 마침내 한 겨레 한 나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통일이 되는 날 칠천만 동포는 그 일의 선봉에 섰던 가장 헌신적인 지도자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런 영웅의 출현이라면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영웅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고민하고 땀 흘렸던 우리의 동료일 것이다.

/이우걸 시조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