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역사를 되돌리려는
한자관련 정책과 법안들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는
교육과 역사의 후퇴
한자어 배척은 안된다
서울시교육청과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의 한자교육 강화 정책안은 한자 병기와 혼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의 예로 설명하자면, "농업은 땅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하여 식물이나 동물을 기르는 산업을 말한다"라는 표현을 "농업(農業)은 땅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必要)한 물건(物件)을 생산(生産)하기 위하여 식물(植物)이나 동물(動物)을 기르는 산업(産業)을 말한다"라고 한자 병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農業은 땅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必要한 物件을 生産하기 爲하여 植物이나 動物을 기르는 産業을 말한다"라는 한자 혼용으로 가기 위한 전단계 방식이다. 한자 혼용이 아닌 한자 병기 방식이라도 쉬운 글말 쓰기를 위해 노력해 온 역사를 되돌리는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왜 그런가 곰곰이 따져 보자.
첫째, 한자 병기는 비록 한자를 괄호 안에 넣는다 하더라도 언문일치 정신이나 효율적인 소통을 거스른 것이다. 인류의 문명사는 입말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기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소통하게 하는 언문일치를 향해 싸워 온 역사다. 유럽이 상류층만이 쓰던 라틴어를 버리고 쉬운 영어 쓰기를 해 온 것도 그러하며 중국이 경전에서 쓰는 고전문에서 좀 더 쉬운 백화문으로 바꾸고, 백화문에서 다시 간결한 간체자를 만들어 쓴 것도 그런 흐름이다. 우리나라는 다행히도 세종 임금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그 기틀을 마련했고 한글전용이라는 언문일치를 실제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는 데 500년 이상이 걸렸다. 이러한 언문일치 역사는 자유와 평등을 이뤄온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해 왔다.
한자 병기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정보이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소통을 방해할 것이다. 설령 한자를 안다 해도 표기 양 자체가 두 배 가까이 늘어 판독과 이해의 경제성이 떨어진다. 영어도 라틴어에서 온 낱말이 무척 많은데 그것을 괄호에 넣는다고 생각해 보면 이러한 병기가 얼마나 우리의 소통의 합리성을 방해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자 병기는 언어의 이해와 소통의 맥락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라는 낱말을 모르는 초등학생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이 두 낱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동물과 식물에 대한 체험과 동물과 식물이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 대화, 문장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부려 쓰고 있다. 이런 아이들한테 이렇게 가르쳐 보라. "이 낱말들은 한자에서 온 한자어인데 한자로는 '動物, 植物'이라고 써. '動'은 '움직일 동'이고 '物'은 '무리 물'자고 '植'은 '심을 식'자야. 그래서 동물은 움직이는 무리지. 쉽지." 그럼 아이들은 이렇게 묻지 않을까? "움직이는 것은 다 동물인가요. 로봇도? 움직이지 않는 죽은 동물은 동물이 아닌 것이에요?" 한자의 의미 또는 어원에 의해 뜻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이러한 간단한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낱말의 의미는 맥락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에 다의성을 띠는데 그것을 하나의 어원으로 환원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셋째, 한자어를 한자로 표기하자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든 한자어를 배척하고 왕따시키는 무서운 언어폭력이다. 고유어를 배척해 온 역사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자어를 배척할 수는 없다. 소통할 수 없는 어려운 한자어는 쉬운 말로 바꿔야 하겠지만 '동물, 식물'과 같이 자연스럽게 쓰이는 말은 고유어와 다름없는 우리말이다. 초등학생들한테, "얘야. '사람'은 고유어이고 '동물'은 한자어야.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자로 적는 것이 좋단다"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 사이의 인종 차별과 다름이 없다.
이처럼 무서운 낱말 왕따를 왜 어린이들한테 주입시켜야 하는가. '동물'이 우리말이라면 당연히 과학적이고 쉬운 우리 고유 문자인 한글로 자연스럽게 소통하게 하는 것이 순리다. 이제 더 이상 한자어를 차별하지 말자. 출신(어원)이 다르다고 다른 옷을 입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이제 순우리말이든 한자어든 따지지 말고 자연스러운 대화와 한글 표기 속에서 지식과 생각을 소통하고 나누게 하자.
세종은 언문일치가 불가능했던 1446년에 28자로 언문일치를 쉽게 이룰 수 있는 문자혁명을 단행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이를 제대로 이루는 데 500년 이상을 소비했다. 이렇게 오래 걸린 것도 억울하고 답답한데 다시 그 역사를 되돌리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김슬옹 세종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