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상인 전 극동대 교수
내 아들 최우영!, 최우영 기자…!

이게 웬일이냐! 어째 이런 놀라운 일이 내 앞에 나타났는가 말이다. 너를 땅에 묻고 작별하자니 그동안 살아온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가슴이 먹먹하고, 참았던 진한 통곡이 치밀어온다. 더이상 너를 볼 수 없다는 이별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구나.

우린 비록 부자 사이지만 각자의 몫을 지키면서도 나는 너를 부를 때 '내 아들 최우영!'. '최우영 기자!'. '후배 최우영!'으로 호칭하며 스스럼없이 술잔을 나누었지.

그리고 너는 부모 모시는 모습이 남달리 반듯해 주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가족모임에는 항상 떠들썩한 분위기로 자리를 즐겁게하고, 늘 당당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너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고 쓸쓸할 것인데 그 자리를 이젠 어떻게 메워야 하느냐. 친근하고, 다정스러운 너의 모습을 이젠 다시는 볼 수 없으니 가슴이 메이고 아리어 눈물만 흐를 뿐이다.

"기자 하지마라, 왜 힘들고 험란한 기자의 길을 가려하느냐?"며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교육자의 길로 너를 이끌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애비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너는 "스승의 길을 잇는 것도 좋지만 오염된 사회를 정화하는 '사회의 교수'가 되는 기자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나는 결국 너의 의지를 꺾지못하고, 어두울 때 더 빛나는 등대처럼 필요할 때 더 가치있는 기자가 되기를 기원하며 너를 놓아 주었다.

밤사이 생긴 사건·사고를 확인하며 현장과 회사에서 잠을 설치면서 고된 하루를 마감하며 정신없이 수습생활을 시작, 20여년이 흘러 데스크에 이르기까지 기자의 사명감과 책임감·자존감으로 너를 서게 하고 있는 모습을 애비는 늘 대견해 했다.

가정을 잘 돌보지 못해 늘 송구하다는 너는 "기자는 연극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고, 모든 사안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사실을 확인하고, 인쇄물로 나온 뒤 혼자 울어야하는 직업"이라고 기자의 애환을 털어놓기도 했고, 나는 그때마다 애처로운 심정으로 너를 격려했다.

진정한 기자의 냄새가 나는 좋을 글을 써 독자에게 감흥을 주고 언론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는 네 모습을 앞으로도 지켜보려 했지만 이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 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짐'이라고 서산대사가 말했지만, 너는 오십도 못살고 무거운 짐만 지다 가는구나. 지독한 병을 몸에 안고 투병하면서도 내색 한번 하지 않고, 가족만을 챙기다 죽음을 예감한 듯 애비에게 남겨놓은 편지 한 통에 "먼저 가는 불효를 용서하세요"라고 적은 말이 유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와 고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평소 너의 건강을 챙겨주지 못했던 애비의 마음이 이제사 죄스러워 한없는 죄책감으로 눈물만 흘린다. 이제 좋아했던 술 한병을 놓으니 마음껏 마시고, 고달팠던 이승의 온갖 시름을 거둬 저승에서 평안을 누리고, 한 평생 헌신했던 경인일보사의 사기(社旗)를 덮고 그곳에서 영면하기를 바란다.

그립고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올게. 눈물을 닦으며 애비가.

/최상인 전 극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