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훈 대진대 행정학과 교수
묻고싶다, 은밀하게 자신들의
보안체계를 갖춘
비밀혁명 조직을 만들고
총기를 사용해서라도
대한민국의 현 체제를 뒤집어
얻고싶은 세상이 뭐냐고…


"1947년 봄/심야/황해도 해주의 바다/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울음을 터트린 한 영아를 삼킨 곳./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1921년에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월남한 김종삼(1921~1984) 시인의 '민간인'이란 시다.

이 시에 나오는 1947년이라면 남북분단이 고착되는 해. 북은 토지 몰수와 공산체제를 완성하면서 자유를 억압하였고, 일단의 월남피난민은 그때부터 나왔다. 시인이 탄 조각배가 공산압제를 피해 해주바다를 숨죽여 건너던 중 아이가 울자, 제 어미가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압제를 피해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너는 '민간인'들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고, 공산체제를 수호하는 자들은 찾아 죽이려 한다. 김일성의 수하들은 눈이 벌겠다. 바다가 삼키다 실패한 숨소리라도 찾아내서 죽이려고 한다. 그런 죽음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아이는 울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미는 어미대로 '살고' 싶었다. 아이는 살고 싶어 울고, 어미는 살고 싶어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한 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아이는 싸늘하다. 차가워진 아이를 붙잡고 어미는 오열한다.

잡히면 죽임을 당하는 슬픈 현실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야음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제 동포를 죽이는 오늘의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 제 동포를 찾아 죽이는 버릇은 65년 이상이 지나도 여전하다. 아니지. 자기 체제가 옳다고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민간인'들을 죽인 버릇은 비뚤어진 권력을 쥔 못된 인간들의 속성이다. 피의 숙청을 통해 공산체제를 세상에 보인 스탈린이 그랬다. 파시스트 독재를 완성하려고 600만 이상의 유태인을 죽인 히틀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죽음을 선사하고 만들려는 세상은 정말 생산과 소비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피로 채색한 권좌에 대한 집착인지는 이제 다 알려져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시인처럼 묻는다. 국가분단이 주는 이 아픔이 얼마나 멀리까지 가야하느냐고. 국회의원 이석기는 RO의 수장으로서 이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북미간 전쟁 상황에 대비해 전쟁을 준비하자", "통신과 유류저장고 등을 파괴하자" 등. 이 말들은 남한에서 전쟁을 대비해 미국을 물리치고 북한 공산세력 위주로 통일하자는 의미라 한다. 이 말들과 저간의 사정들이 내란음모에 해당하는지는 수사과정과 법원에서 드러나겠지만,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언론에 비친 이석기의 말만으로도 용당포에서 아이를 죽인 시대가 다시 겹쳐 보인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낸 이건청 시인이 김종삼시비를 찾은 날 말한다. 한국의 수많은 시들 중 김종삼 시인의 시는 순도와 밀도가 가장 높은 시라고. 필자는 '민간인'이라는 시제목이 바로 그 정수라고 생각한다. 민간인은 모든 권력을 쥔 사람과 그 수호자에 대응되는 말이다. 이 땅에 사는 민간인들은 식민제국의 총검으로 위협한 체제가 무섭고,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밤이면 이편에 서주어야 하고, 낮이면 저편에 서주어야 했던 세월이 무섭고, 그러다가 죽은 엄마, 아버지가, 떨어진 형과 누나가 그립다. 이런 고통 속에 얻은 민주주의가 그래서 소중하다. 아이를 용당포에 바칠 일도, 물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아들을 붙잡고 오열할 일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석기에게 되묻는다. 은밀하게 자신들의 보안체계를 갖춘 비밀혁명조직을 만들고, 총기라도 사용해(이정희의 말로는 농담으로) 대한민국의 현 체제를 뒤집어서 얻고 싶은 세상이 무어냐고 말이다.

김종삼 시인의 어머니는 포천시 소흘읍의 부인터라는 곳에 묻혔다. 그 어머니가 그리워서 생전에 그는 포천에 자주 왔고, 동료와 후배시인들은 그를 포천의 국립수목원 부근에 시비를 만들어 기려주었다(현재 고모리저수지로 이전). '민간인'이란 시도 그 시비에 적혀있다. 그가 무명세계로 돌아간 지도 30년. 그의 시비 앞에서 그의 말을 듣는다. 이석기에 대한 재판은 법원보다 무명세계의 시인이 먼저 하고 있다. '민간인이 자유롭게 숨쉬는' 세상을 만드는 체제가 좋은 것이라고.

/허훈 대진대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