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경기동부연합 내란음모사건은
통진당 울산부산·광주전남연합중
유독 경기의 수원·안양·성남지역
당원들이 관련되었다고 한다
북으로 개성, 동으로 여주, 남으로 안성, 그리고 서쪽의 강화 앞바다까지 포괄하여 선을 그어보면, 경기도는 원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고 이 원 안에 달걀노른자위처럼 서울이 자리하고 있으니, 곧 서울과 경기도가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지방을 경계 지을 때 대개는 산과 강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일부러 둥글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서울과 경기도는 동그랗게 생겼다. 왜일까?
고대 중국의 국가·사회제도를 체계화한 '주례'에 의하면, 왕의 침소로부터 사방 3리를 성(城:내성)이라 하고, 그 성으로부터 사방 7리를 곽(郭:외성)이라 했다. 그리고 성과 곽을 포함한 사방 10리 구역이 경(京)이다. 또 곽으로부터 사방 100리까지를 교(郊)라 하고, 교로부터 사방 100리 안을 전(甸)이라 한다. 그리고 교와 전을 포함하여 경(京)으로부터 사방 500리 안을 기(畿)라 했다.
곧 왕의 침소를 중심으로 성, 곽, 교, 전의 동심원이 그려지는데, 이는 왕궁을 지키는 방어선들이다. 그리고 왕의 침소로부터 10리되는 곽(郭)까지인 경(京)과 500리까지인 기(畿)는 행정구역 개념이다. 그래서 옥편에서는 기(畿)자를 '경기 기'라 훈하고 '왕국천리'라 보한다. 왕궁으로부터 사방팔방 500리까지 기(畿)이므로,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1천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땅덩어리가 넓은 중국의 예이고, 우리나라는 그보다 축소되어 왕궁으로부터 200리 정도를 기(畿) 구역으로 친다.
'경기'라는 말은 고려 문종 23년(1069)에 처음 나왔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50여 개 현을 합쳐 '경기'라 칭한 뒤 왕실 직할지로 삼은 것이 그 기원이다. 서울보다 위에 있는 개성을 중심으로 사방을 경계짓다보니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부 지역까지 기(畿)에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 건국 후 3대 임금 태종에 의해 8도제가 실시되면서, 고려 때의 지역으로서의 '경기'는 사라지고 행정단위로서의 '경기도'가 확립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경기도의 동쪽은 강원도 춘천과 원주에 이르고, 서쪽은 황해도 강음과 배천에 이르며, 남쪽은 충청도 죽산과 직산에 이르고, 북쪽은 황해도의 토산과 강원도 이천에 이르러서 동서가 264리요, 남북이 364리가 된다"는 기술로 보아, 팔도를 경계 지을 때 경기도는 철저히 <주례> 를 원용한 것 같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으로 경기도를 기내(畿內), 기전(畿甸), 근기(近畿)지방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조 임금들은 나라의 위기에서 몸을 바쳤거나 자기가 왕의 자리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경기도 땅들을 공전으로 내려 주었다. 곧 경기도에는 한양의 벼슬아치 부재지주 하에 그들을 대리하는 마름들이 좌지우지하는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야기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 에서 "경기는 토지가 메마른데도 인구가 밀집하였으며, 토지의 소출이 가장 낮은데도 서울로 수송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들이 가장 가난하다"고 적고 있다.
이런 사정인 데도 경기도에서는 숙종 때 양주에서 중 여환이 만민평등의 미륵사상을 내세워 민란을 모의하다 발각된 사건 외에 한 번도 민란이 일어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경기도는 한양을 둘러싸고 있어 중앙권력의 예리한 감시를 항시 받을 수밖에 없다. 곧 민란을 모의해도 지방 관리와 벼슬아치들에 기생하는 마름들에게 쉽게 포착될 수밖에 없고, 민란이 일어나더라도 개성, 강화, 수원, 광주 4개 유수부 군사에 의해 쉽게 진압당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근 한 달째 소위 '경기동부연합 내란음모사건'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경기동부연합, 울산부산연합, 광주전남연합 중에서 유독 경기동부연합의 수원, 안양, 성남지역 당원들이 관련되었다고 한다. 300여 년 만에 경기도에서 일어난 민란 음모다. 그런데 그 혐의가 너무 우습다. 비비탄총을 개량해 총을 만들 계획이었고, 130여 명이 모여 내란음모를 '분임토의'했단다.
/김학민 프레시안음식문화학교교장 성호사설> 주례>세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