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맹문재 안양대 국어국문학교수
훈민정음을 최고의 보물로 여겨
해방전까지 철저히 숨기고
한국전쟁 피난 길에도
정성을 다해 지킨 '간송'과
시인으로 만나 한글날 결혼한
나의 아내 '시인 이선영'


한글날이 다가오니 떠오르는 두 얼굴이 있는데, 그 우선이 간송 전형필이다. 간송은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2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우리나라의 국보급 도자기와 그림과 고서 등을 수집한 분이다. 간송이 없었다면 고려자기며 조선백자며 추사의 글씨며 혜원의 그림 등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고 말았을 것이다.

간송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인 '훈민정음'을 구해서 지켜낸 일이다. 만약 간송이 '훈민정음'을 수장하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글자라고 내세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역사적 문화적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클 것이다. 따라서 간송이 '훈민정음'을 구한 것은 하늘이 도왔다고 할 만큼 기적적인 일이다.

1940년 여름날 경성제대와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에서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김태준 교수는 이용준이라는 제자로부터 자신의 집에 '훈민정음'이 전해져 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는 처가인 광산 김씨 종택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이용준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 부문 특선을 했을 정도로 글씨를 잘 썼고 한학에 밝았는데, 사회주의자인 스승을 따르고 있었다. 김태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훈민정음' 찾기를 갈구하던 간송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찾아가 사실을 알리자 간송은 흥분한 채 빨리 구해 오기를 부탁했다. 김태준은 제자와 함께 안동 시골집으로 내려가 확인했는데, 첫머리 두 장이 찢겨 있었지만 진본인 것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서울에 올라와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세종실록'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한 후 이용준에게 표지를 안평대군체로 쓰게 하고 표지 복원 작업을 시골집에 내려가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사회주의자인 김태준이 검거되어 '훈민정음'은 다시 숨겨지게 되었다.

1943년 여름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태준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간송에게 편지를 전했다.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구입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감시를 받고 있는 김태준으로부터 '훈민정음'을 직접 받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간송은 '훈민정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서를 수집하기 위해 인수한 한남서림의 이순황을 통해 비밀리 받아왔다. 그때 간송이 지불한 '훈민정음'의 값은 1만원이었다. 이용준은 1천원을 요구했지만, 간송은 '훈민정음'이 그 정도의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열 배를 더 지불한 것이다. 당시에 아무리 귀한 책이라도 100원 이상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간송의 배포가 얼마나 큰지, 한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간송은 김태준에게도 사례비로 1천원을 건넸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구한 뒤 최고의 보물로 여기고 해방이 될 때까지 철저히 숨겼다. 일제에 발각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송은 한국전쟁의 피란길에서도 정성을 다해 '훈민정음'을 지켰다. 잠을 잘 때도 품속에 넣고 지켰다. 1956년 간송은 소중히 간직해온 '훈민정음'을 학계의 연구를 위해 기꺼이 영인본 출간을 허락했다. 비로소 우리의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체계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62년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간송이 이와 같은 일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기에 그지없이 안타깝다.

그동안 '훈민정음'을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전시회를 열어왔다. 그리하여 이제는 간송의 업적이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몇 해 전에는 재미 소설가인 이충렬이 '간송 전형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한글 쓰는 일로 밥을 먹고 있는 내가 한글날을 맞이하여 간송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

한글날이 다가오니 떠오르는 또 한 얼굴이 있다. 다름 아닌 이선영 시인, 즉 나의 아내이다. 우리는 시인으로 만나 결혼했는데, 시를 쓰는 일을 새기기 위해 한글날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얼마나 한글의 정신을 가지고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한글날을 맞이하여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
올해부터 한글날이 23년 만에 공휴일로 다시 지정되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글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해 관련 학회나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이기에 환영할 일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지 567돌(나는 다르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결혼한 지 19년이 되는 이번 한글날, 나는 두 얼굴을 새롭게 떠올린다.

/맹문재 안양대 국어국문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