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S그룹의 모 회장은 자동차광이다. 한때 재규어, BMW, 벤츠, 로터스, 람보르기니에 이르기까지 20여대의 자동차를 소유했고, 그래서 번듯한 디자인팀이나 판매망도 없이 이미 과잉인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40억 달러를 쏟아부어 만든 자동차회사를 단 한 푼도 못받고 경쟁업체에 넘겼다."

1997년 외환위기가 한창일 무렵의 모 일간지의 기사내용이다. 재벌총수의 브레이크 없는 권력 남용이 초래한 해프닝이었다.

당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302억 달러를 지원받아 급한 불을 끄는 대신 경제주권을 통째로 IMF에 넘겼다. 이후부터 경제주체들은 살인적인 고금리와 고환율로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 시중은행을 비롯한 수많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헐값에 외국인에 팔렸다. 대마불사의 신화도 깨져 대우그룹을 비롯한 30대 재벌의 절반가량이 좌초되었으며 수백만명의 직장인들이 한꺼번에 실업자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이후 최대의 국난(國難)으로 치부될 만큼 국민 모두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정부는 금융기관 및 대기업들의 부채청산에 혈세 64조원을 투입하는 대신 재벌개혁을 요구했다. 결합재무제표 도입, 상호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주력업종 선정, 지배주주와 경영진 책임강화 등이었다. 외부감사기능을 한층 강화하고 사외이사수 확대 및 감사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했다. 지주회사제도 이때 도입되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도고 놀란다 했다. 웅진, STX, 동양그룹 등 중견재벌들의 잇따른 부도가 15년 전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구태(舊態)경영도 재확인되었다. 진작 청산되었어야할 고질적인 악습들이 여전한 것이다.

중견재벌들 좌초의 결정적 이유는 유동성 부족이다. 장기간의 부동산경기 위축에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가세해 사업전망이 매우 불투명한 터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부실기업들을 연이어 인수한 때문이다. 부채비율의 경우 동양그룹은 2007년의 147%에서 작년 말에는 무려 1천231.7%로 수직상승했으며 같은 기간 STX는 170%에서 256.7%로 늘어 30대 재벌 평균 83.2%를 크게 상회했다. 웅진은 빚만 무려 10조원에 달한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제대로 상환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른 것이다. 문어발 경영이 자기 발등을 찍은 꼴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경영진들의 늑장대응이다. 2, 3년 전부터 이상신호가 감지되는 등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오너경영인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동양그룹은 동양증권, 동양매직, 한일합섬, 레미콘, IT사업 등의 매각을 통한 유동성 조기확보 의견을 묵살하고 기업어음(CP) 불완전판매로 버텼다. 또한 작년 3월부터 최근 법정관리를 신청할 때까지 구조조정 전담부서장을 업무파악도 전에 수시로 갈아치워 시간만 허비했다는 지적이다. 모그룹의 회장은 임직원들의 직언(直言)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무능한 아첨꾼들이 회장 주변에 '인의 장막'을 친 탓에 판단을 흐려 낭패보고 말았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돈다.

오너경영인의 무소불위 권력이 화근이다. 2009년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는 금상첨화였다. 전제주의 경영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삼는 만큼 신속성과 일사불란한 조직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경영은 대체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크다. 제왕적 경영자가 전지전능할 수는 없는 탓이다. 총수들이 순환출자를 이용해서 1%도 못되는 주식지분으로 그룹경영을 전횡하는 것은 또 다른 고질이다.
사외이사제와 감사위원회는 무용지물이며 외부감사제 강화도 말뿐이다.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장치도 부실하긴 마찬가지이다. 600조원에 육박하는 30대 재벌의 눈덩이 채무와 경제력집중 심화는 또 다른 주목대상이다.

천문학적인 수업료를 지불한 대가치곤 성과가 너무 초라하다. 국회에서 상법 개정안을 어찌 처리할지 지켜볼 것이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