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허태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 학예연구사가 '영화 <최종병기 활>과 병자호란의 재해석'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허태구 서울대 학예연구사
"조선의 '중화'는 절대 기준
인조 무능탓에 전쟁 났다면
명 멸망후 척화론 남았겠나"
학계정설과 다른 의견 제시


병자호란(1636)은 인조정권 외교의 총체적 실패 탓인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척화론자들은 어떻게 전쟁 이후에도 정권을 주도했을까.

허태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지난 5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인문학강좌에서 "병자호란은 숭명배금(崇明排金)이라는 반정(反正)의 명분에 사로잡힌 인조정권이 국제정세를 오판하면서 발생했다는 게 기존의 통설이지만, 새로운 접근방식도 주목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허 학예연구사는 이날 '영화 <최종병기 활>과 병자호란의 재해석'이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설명했다.

광해군은 대외적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외교를 펼쳤다. 반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숭명배금 정책을 추진해 후금을 자극했다.

후금은 훗날 세력을 확장해 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한다. 외교적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청에 굴복하지 말고 전쟁까지 불사하자는 '척화론'이 대립했다.

결국 대세가 척화론으로 기울자 청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청은 압록강을 건넌 지 일주일도 안 돼 도성을 급습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만다.

허 학예연구사는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임진왜란을 도와준 '명과의 의리'를 저버렸고, 인목대비를 폐서인시켜 '효'를 저버렸다는 것이 인조반정의 명분"이라며 "동아시아의 정세가 청의 주도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명분을 지키기 위해 국제정세를 오판, 병자호란이 발생했다는 게 가장 교과서적인 설명"이라고 말했다.

2011년 10월 개봉한 '최종병기 활'은 병자호란에 대한 이 같은 학계의 정설을 그대로 반영한 영화다. 영화 주인공 남이는 인조반정 당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무신의 아들이다. 남이는 아버지로부터 "외교를 모르는 자들이 임금을 옹립하니 반드시 전쟁이 날 것이다"라는 유언을 듣게 된다.

또 청에 포로로 잡혀간 여동생을 구출하면서 "백성과 나라를 버린 임금은 이미 큰 죄인이요"라는 말을 남긴다.

인조는 과연 이같이 무능하기만 한 정권이었던 걸까. 이날 허 학예연구사는 학계의 정설에 반기를 든 '사상사적 시각'을 소개했다. 척화론자들과 인조정권의 청에 대한 저항을 강조한 새로운 시각이다.

그는 "과거 정묘호란(1627) 등을 통해 청이 어느 정도의 나라인지는 파악이 됐을 텐데, 정말 이렇게 허술하게 전쟁을 대비했을지 의문이 든다"며 "나라를 망친 주범인 척화론자들이 훗날 조선 후기 사회를 지속적으로 장악한 것도 통설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허 학예연구사는 당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질문도 던졌다.

그는 "당시엔 중화(中華)사상이 보편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대명의리는 어느 정파나 개인을 막론하고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다"며 "척화론은 전쟁의 승리를 오판하거나 명의 문책을 의식하는 사대주의적 감정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명은 멸망했어도 중화 보편 문화를 상징하는 명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척화론자들이 계속 정권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5번째 강좌는 오는 19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이 강사로 나와 영화 '집없는 천사' '도가니' 등을 통해 '우리의 불편한 이웃들:고아·부랑아·장애인'이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