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고 즐거운 분위기 대신
장기화된 경기침체·철도파업 등
어두운 뉴스들로만 가득 채워…
이제는 캐럴 다시 들을수 있는
사회분위기 조성을 기대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저작권 문제를 드는 의견들이 있다. 대형 매장이나 옥외에서 음악을 사용할 경우 작사가와 작곡가에게 공연 사용료를 내야 하고 연주자와 음반 제작자에게 공연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므로 매장들이 거액의 사용료 지불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이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에서 들리지 않는 한 원인일 수 있겠지만, 전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일반 서민들의 생활권이 대형 백화점이나 호텔 같은 곳이 아니라 작은 가게나 식당이나 사무실 등인데,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 장기화된 경기 침체를 들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경기가 어려울수록 가게를 살리는 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벤트도 일종의 투자이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가게들이 추진하기에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경기 침체는 심각한 상황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고, 가계 부채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고 있고, 창업 1년 만에 절반이 문을 닫는 자영업의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서민들의 삶의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데도 정부는 철도 파업에 대한 강경 진압에서 볼 수 있듯이 힘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뿐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에서 들리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인 불황 못지않게 정치적인 분위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북방한계선과 관련된 남북 정상 회담의 논란을 시작으로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을 중단하고, 이석기 의원을 내란 음모자로 고발하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심판을 청구하고, 전교조(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에 법외 노조를 통보하고, 전공노에 대선 개입 의혹 수사를 하는 등 집권당은 매카시즘을 부활시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크리스마스 캐럴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덧 크리스마스는 달력 속에 존재하는 공휴일이 된 지 오래이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 대신 어둡고 답답한 정치 뉴스 같은 분위기가 거리를 메우고 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의 조성을 기대하고 희망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찰스 디킨스가 1843년에 발표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어보자. 이 작품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연극이나 영화나 오페라 등 다양한 형식으로 공연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주인공 스크루지는 인정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수전노인데, 크리스마스 전날 밤 7년 전에 세상을 뜬 동업자 말리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를 깨닫고 베푸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사라진 이즈음 '크리스마스 캐럴'을 다시 읽어보는 의미는 욕심이 많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우리에게 무소유의 가치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실한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다시금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랑과 이해와 양보와 연대의 가치를 인지시켜 준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사회의 제도며 법이며 실천 행동도 깨닫게 해준다.
"나는 자네의 봉급을 올려주겠고, 발버둥치는 자네의 가족을 돕도록 노력하겠네. 오후에 술잔을 기울이며 자네의 가족 문제를 논의해 보세. 불을 지피게. 그리고 다른 일을 하기 이전에 석탄 통을 사오게, 봅 크레치트." 죄를 뉘우친 스크루지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전하는 따스한 음성을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듣는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도 새롭게 듣는다.
/맹문재 안양대 국어국문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