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그 변호인은
학생들에게 중형 구형되자
충격받고 변론에 나섰지만
재판도중 끌려나가 구속 되는
사법사상 초유의 사태 벌어져
요즈음 영화 '변호인'이 선풍적 흥행을 이어가고 있어 화제다. 이 영화는 학벌도, 배경도 없는 상고 출신의 한 변호사가 기득권 사회의 따돌림 속에서 등기·세금 전문 변호사로 돈만을 향하는 삶을 이어가다가, 우연찮게 시국사건을 맡은 후 인권변호사로 변해 가는 상황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기승전결의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와 송강호 등 배우들의 열연 외에,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데는 다른 외부적 요인도 작용했다.
우선 이 영화의 모티브가 전두환 독재정권 초기 대표적 용공조작사건인 부림사건이라는 점, 그리고 그 피의자들을 변호한 사람이 고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실제적 상황이 대중의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30여 년 전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통치가 오늘의 헌법 유린, 국민 무시로 새롭게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 분노한 국민들의 울림이 일파만파 파동친 결과 수많은 사람들을 영화관으로 이끌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런데 왜 '변호사'가 아니고 '변호인'인가? 변호사는 '일정한 법적 자격을 가지고 의뢰자를 위해 민사·형사 소송에 관하여 활동하며 기타 일반 법률사무를 다루는 전문적 직업법률종사자'를 말하고, 변호인은 그 중 '형사 피고인의 변호를 맡는 변호사'이다. 곧 형사사건으로 인신을 구속당하여 자기방어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법률적 지식을 동원하여 그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주장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변호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든 변호사는 변호인이 될 수 있다. 소정의 수임료를 받고 형법 등에 규정된 형사범을 변호하면 변호인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 형사범에 대해서는 그냥 변호인으로 수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처럼 독재정권 시절 권력과 관련된 사건을 수임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사건의 수임이 줄어들어 부의 축적은커녕 사무실 유지조차 힘들 수도 있고, 신변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영화 속의 송우석 변호사처럼, 현실에서도 부와 명예가 보장된 '변호사의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의 '변호인의 길'을 걸어간 분들도 여럿 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가, 노동·농민운동가들을 집중 변호한 김병로·이인·허헌 변호사,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한 이병린·이병용·홍남순 변호사,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하의 수많은 시국사건을 도맡아 변호했던 황인철·홍성우·한승헌·조준희·조영래 변호사 등이 그분들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유린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73년 가을부터 유신헌법 철폐 시위를 벌였고 종교인, 교수, 문인 등이 유신헌법 철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1974년이 되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 철폐 주장을 펴면 군법회의에 회부,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를 무시하고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가 다시 전국 대학에서 일어났다. 소위 민청학련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빌미로 민주화 운동을 뿌리 뽑으려 했다. 중앙정보부는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구속했고, 6천여명의 학생을 연행, 그 중 200여명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반국가단체를 조직, 정부전복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군사법정에서 학생들은 민주회복이라는 순수한 주장이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구타로 반국가 음모로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군 검찰은 학생들에게 사형, 무기, 징역 20년 등 중형을 구형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한 변호인이 열띤 변론 끝에 "본 변호인은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론을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고 싶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그날 저녁 그 변호인을 바로 구속, 피고인석에 앉혔다. 40년 전 그 변호인, 강신옥 변호사이다.
/김학민 프레시안음식문화학교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