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양적 활기 띠는것 같지만
시민 생활 밑바닥 열어보면
없는자의 고단함·분노뿐…
사회적 시스템 변화 '절실'
우리도 교훈 삼아야
2020년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한 일본은 그를 국가 개조의 계기로 삼는 듯하다. 어린 학생들을 꿈나무 선수로 선발하고 그를 미디어로 온 사회에 알리고 미래를 향한 투자라며 분위기를 조성한다.
외국인 선수나 관광객과 영어로 말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명령조 광고도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올림픽 때 즈음하여 내놓을 최첨단 기술, 제조품에 대한 열망도 대단하다.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을 통해 일본이 아직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양을 앞서가고 있음을 과시했던 때를 재연이라도 할 태세다.
자연스레 올림픽 유치 성공 분위기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유치에 공을 세운 인물들은 온갖 미디어를 통해 영웅 대접을 받는다. 유치 때 내놓은 언사들은 최고의 유행어가 되었다. 다가올 소치 동계 올림픽, 브라질 월드컵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어느 때보다 강조하고 선전을 다짐하느라 분주하다. 불황에 시달려온 기업으로서도 스포츠와 연결된 애국 마케팅으로 한몫 노리고 있으니 일본 전체가 올림픽으로 들썩이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제국 경영을 해본 적이 있고, 세계 경제 1위국의 지위를 누렸던 적도 있으니 일본의 국력, 저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순 없다.
비록 일본 사회가 경제 침체, 자연 재해 등으로 지금 풀이 죽어있는 듯 보이지만 특수를 만들고 현저한 기술개발이 성사되면 과거의 명예를 되찾지 못할 일도 아니다.
그에 대한 일본 시민들의 열망이 강하고 정치권, 기업도 열망에 공명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대체로 사회도 전에 비해 활기차 보이기도 한다. 올림픽을 널리 선전하고 그를 통해 사회 개조를 꾀해 보겠다는 일본 정부의 의지도 그런 외양으로 드러나는 활기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외양을 넘어 시민들의 생활 밑바닥 현장에 돋보기를 갖다 대면 전혀 다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가진 자들의 '갑질'은 철옹성과도 같다. 세입자가 들여야 하는 노고는 고단함을 넘어 없는 자의 분노까지 자극한다.
개인의 신상과 관련된 업무는 꼼꼼히 처리되긴 하지만 관료화의 그물에 얹혀 '느림의 미학'의 희생물이 되기 일쑤다. 정치인들의 허리 숙임은 선거철에나 볼 수 있는 '정치인 코스프레'일 뿐이다. 일본만이 가진 전통적 시스템이라며 자랑하지만 마치 주인만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자물통과 같은 시스템으로 사회가 움직이고 있다.
일본의 밑바닥 정서로 보자면 올림픽을 계기로 꾀하려는 일본 개조는 개조의 대상을 하루바삐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개조를 부르짖는 쪽이 첫 번째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권력을 쥔 쪽에서 더 많이 개조를 설파하지만 정작 개조는 그들이 속한 편에서 먼저 이뤄져야 한다. '갑질'을 버리지 않는 한 일본의 시민들은 얼른 반응을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자신만이 자랑하는 시스템으로는 일본 바깥의 글로벌 시스템과는 어떤 식으로든 시스템 교환을 해내지 못한다.
오히려 고립 시스템을 자초할 뿐이다. 지금까지 해온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기반으로 시스템 개조를 해내지 않고선 그 고립을 벗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서야말로 이른바 분수효과가 필요하다. 위에서의 변화가 아래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뿐 그 반대는 참으로 어렵다.
일본이 걸어온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미래처럼 여겨지지 않는 쪽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리 유쾌한 비유는 아니지만 쉽사리 피할 수 없는 사실에 근거한 결론이다. 일본이 자신의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인식하게 되는 일이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권력자들의 무능함이 아니라 시민에 전가하려는 일 등도 남의 일이라 가벼이 넘겨버릴 일만은 아니다.
타산지석 삼는 일은 많아서 나쁠 게 없다.
/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