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수살대 사용 마을굿 국내 유일로 알려져
무형문화재 지정 후 되레 관심 줄어들까 걱정
석모도가 바람막이 구실을 해주고 바다가 깊어 예로부터 큰 배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자연히 외포리는 해산물의 집산지가 되었고, 강화의 어선들이 연안으로 고기잡이 하러 나갈 때에도 외포리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 많은 어선의 안녕과 풍어를 빌어주던 굿이 바로 곶창굿이다.
현재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강화 외포리 곶창굿은 새해가 되면서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해서 굿날을 정하는데, 음력 2월 6일에서 10일 사이에 길일을 잡아 거행한다.
오늘날에는 3일간 펼쳐지지만 예전에는 1주일간 굿을 했다고 한다.
굿을 책임지는 당주를 비롯한 소임자들은 3일전부터 굿당에 올라가 목욕재계하며 머무른다. 7일간 굿을 하고 나서 하루동안 또 치성을 드려야만 굿당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꼬박 열하루를 굿당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당주는 집안에 변고가 있어도 굿당을 지키고 있어야 했으니 당주의 책임이 얼마나 중한지 알 수 있다.
곶창굿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제이기도 했다. 굿이 열리기 열흘 전부터 회관에 모여 봉죽, 서리화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재물 준비와 음식마련 모두 마을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집집마다 돈을 추렴하여 경비를 마련했는데, 항상 넉넉히 걷혀 굿 준비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정정애 선생은 곶창굿을 주관하는 당주만신이다. 35세의 늦은 나이에 신내림을 받은 선생은 외포리 태생으로 곶창굿의 산역사이기도 하다.
곶창굿은 수살굿으로부터 시작한다. 수살굿이란 수살목 앞에서 치러지는 굿이다. 수살목은 5개의 가지가 달려있고, 가지마다 오리가 한 마리씩 날개를 편채 바다를 향해 바라보고 있어 오방수살대라고도 한다. 오방이란 동서남북 외에 중앙을 포함한 방위개념이다.
정정애 선생의 인도로 여러 제자들과 소임자 그리고 농악패들이 바닷가로 행하는데, 그 행렬이 제법 장엄하다. 수살목은 포구를 중심으로 동서에 각기 하나씩 자리하고 있어 두 차례의 굿이 진행된다.
수살굿은 고깃배나 군선들이 바다에서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오방수살대를 사용하는 마을굿은 강화 외포리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살굿이 끝나면 돌돌이 우물용왕굿이 펼쳐진다. 해안에서 굿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세 곳의 우물에서 굿이 진행된다. 정정애 선생은 용왕님께 우물에 물이 항상 많이 솟고, 맑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우물굿을 마치면 바로 굿당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굿이 펼쳐진다. 곶창굿은 오후 4시 정도면 그 날의 일정을 끝내고, 마을사람들의 축제가 시작된다.
주민들 중 한사람이 무복을 입고 무감을 서는데, 대감신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면 대감신이 무감을 서는 사람에게 내려온다고 한다. 무감을 통해 만신이 아닌 마을 주민 누구도 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곶창굿의 중심은 이튿날 행하는 장군거리에 있다. 장군거리는 작두거리라고도 한다. 정정애 선생은 순수한 몸과 마음으로 장군신의 강신을 준비하고, 작두에 올라탐으로써 장군신이 강신해 있음을 증명한다.
선생은 작두를 타는 이유가 마을 전체가 편안하기를 기원하고 잡귀를 누르기 위함에 있다고 말한다. 이어 돼지를 제물로 바친다. 돼지는 산채로 굿당으로 끌고 올라갔다가 장군거리 전에 바로 잡는다.
돼지를 잡는 곳을 돼지바위라 부르는데, 돼지가 스스로 가서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고 한다.
정정애 선생은 "신기하게도 돼지가 자기가 죽을 자리를 아는 모양입니다. 예전에는 흑돼지만 구해 썼는데, 오늘날에는 구하기 힘들어서 백돼지를 씁니다"라고 말한다. 마을사람들은 장군거리가 끝나야 비로소 고기 맛을 볼 수 있었다.
3일간의 굿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어선들이 바다에 나갈 수 있었다. 그 때에도 정정애 선생이 포구에 가서 배가 나가는 것을 봐주어야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마을사람들 사이에 대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정정애 선생의 신력과 덕망이 매우 두터움을 알 수 있게 한다.
곶창굿은 마을굿이자 대동굿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치러지는 굿이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소임자가 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한다.
곶창굿이 끝나야 인근의 굿당에서도 굿을 할 수 있었다고 하니, 강화에서 곶창굿의 위상이 제법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곶창굿의 중심에 정정애 선생이 있다. 선생은 "굿이 열리게 되면 13개 읍면에 있는 농악패들이 다 모여서 한바탕 놀고 그랬습니다. 여기저기서 장사꾼들이 모여서 사람들로 북적거렸지요. 엿장수들도 오고. 그래서 술집과 밥집 모두 장사가 잘되었어요"라고 예전모습을 회고한다.
곶창굿이 외포리의 마을 축제였다는 의미이다. 그 축제에 강화군민의 관심이 쏠려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정애 선생은 "문화재로 지정받기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추렴을 해서 굿을 했어요. 그래도 부족함이 없었죠. 그런데 문화재로 지정받고, 인천광역시에서 경비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돈을 내려고 하지 않아요" 라고 말한다.
단순히 돈이 걷히지 않는 것을 우려하는 말은 아니다. 마을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선생의 걱정인 것이다.
필자가 인천광역시나 제자들에게 바라고 싶으신 것을 묻자 웃으시며 "바랄게 뭐 있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다른 무형문화재 선생님들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 제자 양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로 재차 애로사항이나 건의할 만한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으나 역시 대답은 "없습니다"로 되돌아온다.
정정애 선생 문하에는 제자들이 넘쳐난다. 신딸은 물론 제수를 준비하는 사람 등 다양한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 항상 선생의 주위에 있다.
선생은 굿이 열리는 기간에 마을 곳곳을 돌며 축원을 해준다고 한다. 마을을 사랑하고, 주민들을 보살피는 넉넉함이 선생의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선생의 인자한 미소가 강화도 외포리 곶창굿이 인천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오는 3월에 개최될 곶창굿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향할 것 같은 느낌이다.
글·사진/심효섭(가천박물관 학예실장, 인천광역시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