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엄중·선거 코앞인데
정치권 폐지 설왕설래 '졸속'
예산눈감고 단체장발목 알면서
또 묻지도 않고 투표할 것인가
가장 큰 책임은 유권자
지난 2006년 지방선거였다. 부산시 구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으로 공천받은 후보가 등록 직후 바로 실종되었다. 선거가 끝나는 날까지도 후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후보자는 선거운동기간동안 유권자들과 얼굴 한번 본적 없었지만 당선되었다. 후보자가 없는 상황에서 당선되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경쟁 후보들의 허탈감은 더했다. 사건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당선된 후보는 실종 한 달 만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비극으로 끝난 당선자의 운명도 안타깝지만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의 지방선거 그 자체다.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깃발만 꽂으면 후보자가 어떤 사람이든 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정당 공천이 당선으로 향하는 특급 티켓이 된 것이다.
지방선거를 5개월도 남겨놓지 않는 시점에서 지방선거제도와 관련된 여야의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그 중 백미는 정당공천제 폐지와 관련된 부분이다. 1991년 재출발한 지방자치제도가 가장 강조한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제왕적 대통령제도라고 할 만큼 대통령 중심적 국정에다 중앙당이 지방정치의 생명줄을 쥐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당공천제인 것이다. 지방행정의 리더를 선택하는 과정이 오롯이 지역민들에게 맡겨지지 않고 중앙당의 방침과 유력인사의 정치력에 놀아났던 것이다. 지난 10일과 11일 MBC와 리서치앤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전국 1천명, 유무선RDD전화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P)를 보면 '정당공천제 폐지' 의견이 46.5%, '정당공천제 유지' 의견이 35.4%였다. 국민여론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코앞에 두고 졸속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당공천제에 대해서 찬반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논의를 지켜보며 국민들은 불쾌감과 실망감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정당 공천과 관련된 몇몇 주장에 대해 실상과 다름을 파헤쳐보자. 첫째 정당공천을 하는 이유가 후보의 난립을 막고 정치 신인의 발굴, 여성정치인에 대한 배려차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일부지역에서 무소속이 여전히 난립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까지 지방선거 공천 제도를 유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정치인들은 볼멘소리를 하고 제대로 된 정치신인은 발굴되지 않았던 것일까. 결국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인 것이다. 둘째 공천제도가 없으면 토호세력이 발호하고 현직의 부패와 전횡이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정치의 부정부패와 무능한 현직 단체장의 연임이 공천제도가 없다고 하여 일어날 문제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무능한 현직 단체장과 부정부패한 지방의회 의원들에게는 왜 공천을 주어왔는가. 지방정치의 문제점은 공천제도가 없어질 경우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공천제도가 있음에도 꾸준히 발생해 온 문제였다. 오히려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을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정치개혁특위에서 마련되어야 한다. 부정부패와 연루된 선출직에 대한 법적 처벌을 몇 배로 강화해야 한다. 무능력하고 정책수행 기능을 상실한 단체장에 대해서는 주민소환을 더 강력하게 할 수 있도록 보완되어야 한다. 지방의회에 대해서는 방만한 예산을 눈감아주거나 단체장에 대한 이유 없는 발목잡기를 못하도록 지역 선관위와 연계한 '주민감시제도'를 본격화해야 한다.
지방정치는 기로에 서있다. 지난20여 년간 부단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만족도는 매우 낮다. 지방정치를 도외시한 중앙정치권 때문일 수도 있다. 선거 때만 90도로 절하고 아플 만큼 악수하는 진정성 없는 지방 정치인들의 무성의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책임은 유권자에게 있다. 우리가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는 그 사람들을 우리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후보자의 경력과 공약을 제대로 안다고 한 유권자는 24.5%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식의 투표를 우리가 한 것이다. 심지어 지방선거제도를 마음대로 손대는 것에 대해 분노조차 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역 유권자들의 생활과 직결된 지방선거제도 개혁 방향에 대해 우리는 설명조차 제대로 들은 기억이 없다. 청마의 해 갑오년,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식의 투표에 그친다면 우리에게 남겨질 말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유권자는 바보다'.
/배종찬 리서치&리서치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