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자전'의 주인공 김한진과 두 아들의 집은 문학산을 등지고 있었다. 현재 문학산 인근에는 고만고만한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조재현기자
재산 있으되 나누고, 부유하되 권력탐하지 않는 '착한 부자'
18세기 인물전 '일몽고' 180명 이야기중 하나… 김한진과 문답 형식 기록
'문학산 등지고 있다' 내용 미루어 인천도호부청사 맞은편 자락 집터 추정


 
이규상(李奎象·1727~1799)은 인천을 노래한 '숨은 문인'이다. 그는 인천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이사질(李思質)이 1765~1768년 인천부사를 지낼 당시 인천에서 생활했다.

학계에서는 인천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문인으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과 이규상을 꼽는다. 이규상은 자신이 쓴 18세기 인물열전인 '일몽고(一夢稿)'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몽고는 18세기 조선의 내로라하는 인물 180여명의 이야기를 담은 문집으로, 1935년 간행된 한산 이씨 문집 '한산세고(韓山世稿)'에 포함(제19권~제31권)돼 있었다. 이중 권28에는 총 17개의 전(傳)이 실려 있다. '김부자전(金富者傳)'은 그중 하나다.

이규상이 1765년 인천 곳곳을 유람하고 이를 소재로 지은 '인주요' 9편과 '속인주요' 9편은 당시 인천의 현실, 인천 사람들의 삶, 복식, 역사와 유적, 풍류 등을 고루 담아 인천의 '죽지사'(竹枝詞)로 불린다. '문학 속 인천을 찾다' 다음 편에서는 '인주요'와 '속인주요'에 그려지는 인천을 찾아 나선다.

명문가인 한산 이씨 자손이었던 그는 잠시 최말단직 품관인 참봉(參奉)을 지내기도 했지만 이내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평생 학문·문장에 묻혀 살았다.

이종묵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규상은 호를 일몽(一夢)이라 했는데 쉰 살에 부인을 잃고 학문에 의지해 살아가는 허망한 인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평생 시만큼 좋아한 것이 없어 '시를 보면 큰 사내가 음식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샘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규상의 '일몽고(一夢稿)'는 유학자·실학자·기술자·서예가·화가 등 18세기 이름난 180여명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담고 있다. 특히 이규상은 이야기 대상을 당파나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정해 당시의 사회상·문화·예술 등을 짐작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 '김부자전' 원문
일몽고에 담긴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김부자전(金富者傳)'은 단연 눈에 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재물·부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관직을 뒤로 하고 평생 글을 지으며 살았던 이규상이 이와 달랐을 리 없다.

그런 그가 열녀·효자·충신이 아닌 인천 문학산 자락에 살았던 부자 '김한진'을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규상은 김부자전 말미에서 그 이유를 밝혀 놓았다.

"대저 부자의 말은 졸렬한 것 같으나 실질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긴한 밑바닥에서부터 하여 이후 것을 만든 것이니, 황로의 뜻에 몰래 합하는 자인가. 천만의 재화를 쌓았고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순수한 복을 누릴 만한데도 스스로 엎어지지 않았다…(중략)…'하려고 해서 한 것이 없는데도 되었다'는 것은 천명을 아는 자의 말에 가깝다. 이런 까닭에 김부자전을 짓는다."

이규상이 김부자전에서 그리는 김한진은 그야말로 '착한 부자'다. 분수를 알고, 나눔을 실천하고, 과한 욕심을 품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착한 부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이규상이 김한진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김한진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착한 부자에 대한 희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규상과 김한진이 나눈 문답에서는 평범한 삶의 모습과 소시민이 기대하는 긍정적 부자상을 찾아보는 일도 가능하다.
 
▲ 이규상의 아버지가 일했던 인천도호부청사는 현 문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조재현기자
# 부자 김한진의 검소한 생활

김부자전에 따르면 김한진은 가진 돈이 만 냥에 가깝고, 곡식은 천 석에 이른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을 통해 김한진의 재력을 추측해 보자.

주인공 허생이 한양에서 제일 부자인 변씨에게 빌린 돈이 딱 만 냥이다. 허생은 이 돈으로 안성에서 시세의 두 배로 과일을 모조리 사들여 나라 경제를 뒤흔든다.

조용헌(불교민속학박사)은 '소설보다 더 재미난 조용헌의 소설'에서 "조선시대 7~8인 가족이 1년동안 먹는 쌀의 양이 대략 5가마라는 통계가 있었다. 1천가마는 2천명이 1년을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이라고 썼다.

김한진은 큰 부를 축적했지만 무척이나 검소하게 생활했다.

"김부자 부자(父子)의 집은 제도가 일정하여 주방이 두 칸, 마루가 두 칸, 방이 두 칸이고, 또 한 칸 방 좌우에 처마를 더하여 모두 일곱 칸이었다.…(중략)…마당은 겨우 말을 돌릴 수 있을 정도였다…(중략)…집에 완호물은 없이 다만 농기구와 풀을 저장해 놓았을 뿐이다."

이 김한진의 집은 '문학산을 등지고 있다'는 내용으로 미뤄보면,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던 남구 문학초등학교 맞은 편 문학산 자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규상은 재력에 비해 소박한 집을 보고 느낀 의아함을 글로 그대로 드러냈다.

또 문답을 이어가며 김한진이 비단 옷을 입지 않고, 말을 타지 않으며, 육식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규상이 짧은 문답에서 굳이 김한진이 입고, 먹고, 즐기는 것을 물은 것은 부에 휘둘리지 않고 평범하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부각시키고자 함이다.

김부자전에는 당시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삶의 변화도 보인다.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17~18세기 인천의 모습을 정확하게 꼬집어 낼 자료는 찾아내기 어렵다. 다만 조선시대 후기, 이앙법 등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돼 전국적으로 농사를 통해 부를 쌓은 이들이 출현했다.

바다에 인접해 어업 치중이 높았던 인천에서도 같은 변화가 있었을 거라 본다. 김부자전에서 김한진의 아버지가 어업에서 농업으로 바꾼 후 재산을 쌓기 시작했다는 것, 그 역시 농사를 통해 계속 부를 쌓았다는 것은 시대상에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 문학초등학교에는 인천도호부 청사 객사 일부와 동헌이 남아 있다. /조재현기자
# 현대판 김한진의 등장을 기대하며

여러 학자들이 김부자전에 주목하는 것은 조선시대 치부담(致富談)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긍정적 부자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치부담 주인공은 대부분 우연한 횡재, 조력자의 등장, 매점매석 등으로 부를 쌓는다. 또 부자는 주변으로부터 원망을 받는다. 하지만 김부자전은 이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김한진은 부를 쌓는 과정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김한진은 가치관에서도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권력으로는 재산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신의 부유함으로 첨사나 만호의 공명을 바꾸고자 하십니까?"하니 "바꾸기도 어렵고 비록 바꿀 수 있더라도 낮은 관직으로는 오래도록 먹고 살 수 없으니 본분을 지키느니만 못합니다"하였다. …(중략)…"한 사람이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없는데, 당신이 농사를 지을 때는 좋은 땅을 택하여 농사를 짓습니까?"하니 "내 땅이지만 좋지 못한 땅은 남에게 주면 사람들이 경작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쉽게 묵은 땅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좋지 못한 것을 골라 내가 스스로 거기에 농사를 짓습니다"하였다.

이규상은 대화를 통해 김한진이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부자임을 알아봤고, 그의 삶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문답법을 선택해 가능한 객관적으로 김한진의 삶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배우도록 했다.

최기숙 연세대 국학연구원 HK 연구교수는 "조선시대는 윤리의식이 경제관념에 앞섰던 때지만 후기로 가면서 사람들은 화폐의 가치, 돈의 힘을 알게 됐고 바람직한 부자에 대한 상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눔을 아는 부자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놀부와 같은 인물을 내세워 문학 작품속에서 현실의 기대와 아쉬움을 녹여냈다. 현재 우리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김한진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김한진은 이들 5명에게 재산을 똑같이 배분했다고 한다. 김한진 집안에는 유산을 둘러싼 다툼도 없었다. 상속재산 분배 문제로 칼부림까지 나는 세태에서 볼때 무척이나 선구적인 부의 분배였다.

'착한 인천 부자' 김한진이 살다 간 지 250여 년. 문학산을 병풍삼아 빽빽하게 들어선 문학동 빌라촌. 지난 21일 오후 찾은 문학동 일대의 고만고만한 건물들에는 우리네 소시민들의 삶의 풍상이 짙게 배어났다.

김한진과 아들들의 집도 이곳 어딘가에서 한 마을을 이룬 10여채의 가옥과 비슷한 모습으로 섞여있었을 듯 눈에 아른거렸다. 가진 것을 드러내지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작가 이규상의 아버지가 근무했던 인천도호부청사의 흔적이 남은 인천문학초등학교 교정에서 문학산을 바라보니, 부자이면서도 진정 나눔을 알고, 소박한 생활을 즐겼던 김한진 같은 현대판 '착한 인천부자' 이야기를 많이 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밀려왔다.

글 = 박석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