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재 논설위원
존재감 알리려고 쏟아낸 발언 아쉬움만
분명한건 정치인들만 냉정한건 아니다
이젠 유권자도 아주 독해졌다는 사실


정치판은 피도 눈물도 없다. AI가 창궐하고, 전 국민 개인정보가 탈탈 털려도 정치판은 6·4 지방선거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중이다. 정치인은 피도 눈물도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 동지가 되고, 오늘 동지가 내일 적이 된다. 손바닥 뒤집는 건 다반사다. 얼굴이 두껍지 않으면 정치를 하지 말라는 성현의 말을 곱씹어 보는 요즘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최근 어느 모임에서 박근혜 정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기자가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니 보통 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 지사는 이날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의 이름하에 귀중한 취임 초기 1년을 허송세월했다"며 "작년 한 해가 매우 중요했는데 임기 초반 대통령이 내내 답답했다"고 말했다. 기초선거 공천제에 대해서는 "공천권을 주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치개혁의 첫걸음"이라며 새누리 당론과 정면배치되는 발언도 쏟아졌다. 이런 김 지사의 발언을 두고 말들이 많다. 직설적 발언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김 지사의 발언에 대해 "박 대통령이 아니라 김 지사 본인이 자신의 임기말을 허송세월했다고 이야기하는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받아쳤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뜻이다. 정우택 최고위원도 "스스로 자극적인 자해적 발언을 통해 큰 선거를 앞두고 문제를 일으키는 모습은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특유의 직설화법 때문에 숱한 설화(舌禍)를 남겼던 김 지사다. 2년전 소방서 119 전화(電禍)사건은 수십건의 패러디로 재생산돼 인터넷상에서 회자됐다. 김 지사는 최근 경기지사 불출마 입장을 밝힌 뒤 정부와 여당을 향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일각에선 이같은 행동이 당내 기반이 없는 김 지사가 당 복귀를 앞두고 존재감을 보이려는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의 한 단면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날 발언의 압권은 김 지사의 자화자찬에서 정점을 이뤘다. 김 지사는 "경기도가 지난해 매우 어려웠지만 우리는 빚을 한 푼도 내지 않았고 부채 없이 4천억원의 감액추경으로 군살을 모두 뺐다"고 말했다. 경기도청 광교 신청사 이전사업 중단과 관련해서는 "공무원과 광교 주민이 모두 신청사를 짓자고 했지만 (내가) 스톱시켰다"며 "공무원이 공공청사가 부족해서 일을 못하는 게 아니다. 급식비를 깎아가며 도청부터 지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과연 김 지사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김 지사는 광교신도시 도청이전문제와 관련, 집권 2기내내 광교주민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빚어왔다. 또 평택 브레인시티 사업지구 해제 절차 지연과 관련해서는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등 우유부단한 도정이 논란거리였다. 또한 최대 역점사업이었던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와 USKR(유니버설스튜디오코리아리조트)사업은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도 산하 지방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은 이제 구조조정없이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다. 어디 이뿐인가. 지난해 세수예측을 잘못해 극심한 부동산 거래 침체로 4천500억원의 세수결함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산부족 이유를 내세워 무상급식 지원예산 860억원을 전액 삭감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모두 경제상황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다.

나는 김 지사의 불출마 선언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는 사람중 한 명이다. 김 지사는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대권의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이런 결정을 내린 모양인데 세상의 이치가 꼭 그렇지도 않다. 이인제·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들도 모두 그런 생각으로 그 좋다는 지사직을 버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판에 뛰어들었다가 대권은커녕 여전히 강호를 배회중이다. 그런면에서 3선 지사가 돼서 숙원사업이었던 GTX, USKR 사업을 완결지어 주었다면, 경기도민은 끝까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그 진정성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서 쏟아냈던 이번 발언이 아쉬웠던 것도 그런 이유다. 어차피 보궐선거를 위해 다시 돌아올 생각이라면 더 그렇다. '제2의 이재오'가 될까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 분명한건 정치인들만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유권자도 피도 눈물도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이제 유권자도 아주 독해졌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