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식 대학순위' 교육부에서 또 발표할까 걱정
'일류대 합격·일류기업 입사' 1등인생 보장안돼
더 성숙한 사회되려면 1등주의·서열문화 버려야


1990년대 중반이니 한 20년쯤은 됐나 보다. 교육 분야를 주로 취재했던 기자시절이다. 사회적으로 고교 서열화 논란이 가열되고 '1등주의 심리'를 우려하던 때다. 이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고교와 대학을 서열화하지 않겠다는 기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수능 수석합격자, 각 대학의 수석합격자, 고교별 대학합격자 수, 지원가능대학 분포 등을 앞으로 보도하지 않겠다는 자율실천강령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언론에서도 '1등, 최고, 전국 최초, 세계 최초'라는 단어는 기자들이 가장 좋아한다. 독자들의 입맛에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들은 그 이후 수능 수석과 대학 수석합격자가 발표될 때면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 없어졌다. 수석합격자의 학교와 집을 찾아다니며 앞다퉈 취재경쟁을 벌이는 수고도 사라졌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이같은 현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국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1등 서울대가 1996년 이후 10년간의 고교별 합격자 현황을 보도자료로 배포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울대의 의도는 지역균형 선발로 합격자 배출 고등학교가 다양해졌다는 것을 알릴 의도였다지만 기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충취재에 들어간 기자에 의해 지난 10년간 서울대에 진학시킨 고교와 합격자 수가 낱낱이 공개됐다. 그 기자 역시 1등을 자처하는 신문사 소속이었다. 10년간 서울대 합격자의 고교별 현황에 목말라하던 일부 독자들의 갈증을 씻어준 것이다. 그 기자는 교육부 기자실 1년 출입금지 조처가 내려졌음은 물론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해프닝이었다.

이후 서열화를 없애는데 보탬이 되자던 기자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지금 언론에는 온통 서열화 아니면 1등만이 존재한다. 서울대를 비롯해 사법시험 합격자의 고교별, 대학별 숫자가 큰 관심이다. 외국어고 출신이 사법시험 수석합격자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기사는, 내 자녀의 1등주의에 빠진 학부모들을 외고나 특목고만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법률관련 전문지에서 유일하게 매년 발간하는 '법조인○○'이라는 책이 있다. 현직 판·검사에서부터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전체 사법시험 합격자의 사진과 프로필이 실려있다. 수천 쪽 분량이다. 부록에는 출신 고교별, 대학별 색인이 일목요연하게 나온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로 매긴 일종의 고교, 대학 서열표나 다름없다. 서울대와 사법시험. 물론 1등들이 가는 곳이다. 서울대 출신이라고 모두 취업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서울대의 지난 해 순수 취업률은 61%를 조금 웃돈다. 지난 1월 수료한 사법연수생 가운데 절반 이상은 진로가 결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도 1등의 자리를 찾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삼성의 총장추천제가 여론의 화살을 맞고 없었던 일로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다. 아무리 삼성이 1등 기업이고, 대학은 취업난을 겪고 있다지만 삼성의 이번 대학별 인원 할당 조치는 상아탑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오만함의 극치였다. 자기네들 입맛대로 대학을 서열화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대학 총장의 권위를 인정했다면 면접만으로 뽑아야 옳을 일이었다. 더욱이 추천서에는 총장이 자필서명해야 한다며, 그것도 이메일로 일방 통보했다. 자칭 글로벌 1등기업이라는 삼성으로서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었다. 대학은 삼성의 서류전형 업무 대행업체가 아니다. 기업이 인재를 총장에게 추천해달라고 요청할 때 정중하게 하는 것이 기본 예의다. 벼도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 않는가.

지난 달 교육부가 발표한 대학구조개혁방안에는 모든 대학을 최우수~매우 미흡까지 5등급으로 분류해 정원 감축에 차등을 두고 퇴출까지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역시 대학을 한 줄로 세워 서열화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은 지금 뼈를 깎는 고통 속에 자구노력 중이다. 대학에서도 학령인구의 대폭적인 감소를 모르는 바 아니다. 어느 대학이 부실한지, 교육수요자인 학부모와 학생들이 더 잘 안다. 절박한 심정의 대학들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이번에 문제가 된 삼성식 서열에 따른 1~200등 대학 순위가 또 교육부에 의해 밝혀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세상을 사는데 1등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류대에 합격했다고, 일류기업에 입사했다고 1등 인생이 보장되는 건 더욱 아니다. 1등주의와 서열문화.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해 하루빨리 개선돼야 할 의식들이다.

/이준구 경기대 국어국문학과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