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때론 사서(史書)보다 더 많은 역사적 기록을 담아내기도 한다. 18세기 선비 이규상이 쓴 '인주요(仁州謠)'와 '속인주요(續仁州謠)'가 그렇다.

조선시대 지방에 간 서울 양반들이 '외부의 시선'으로 시골에 펼쳐진 자연 속에서 풍류를 노래하거나 임금을 향한 충성심을 드러낸 게 일반적이었다면 이규상은 촌동네의 평범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해 시로 남겼다. 그는 명문가 집안의 양반이었지만 하층민과 접촉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천시하던 갯가의 염부(鹽夫)와 외딴 섬에서 말을 기르는 목자(牧子)를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했다. 또 세속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1413년에 왕이 내린 '인천'이란 지명 대신에 당시 민가에서 널리 쓰이던 '인주'를 택해 시의 제목으로 지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려 때도 그랬지만 당시까지도 서울 양반들 눈에는 인천이 '외딴 시골'에 불과했다.

당시 기록문화는 양반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바닷가를 생계의 터전으로 삼은 옛 어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갯가노래', '뱃노래' 등과 같은 구전 민요 정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규상의 인주요·속인주요는 조선 후기 인천 지역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쓰일 만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인천 노래'를 쓸 것인가. 모두가 함께 고민할 문제다.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