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까지 차오른 눈송이 뚫고
백석산 정상 서면 시원한 조망
심설 찾는 이 적어 '한적함' 매력
능선 길 내고 백설 헤치며 하산
산행지: 강원 평창 잠두산(蠶頭山 1,243m) ~ 백석산(白石山 1,365m)
15년 전 산악회 선후배들과 가리왕산에서 중왕산을 거쳐 백석산을 오른 후 하산하는 일정으로 찾았던 곳이다.
15㎞ 정도의 구간을 사흘간 꼬박 러셀을 해서야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적설량이 대단했으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교통편 또한 불편하기 짝이 없어서 오고 가는 데만 꼬박 하루씩 소요될 만큼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는데 현재는 월드컵이 개최되던 해에 열린 신리~마평간 6번 지방국도 덕분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심설산행의 최적지로 꼽는 선자령이 빼꼼히 들여다보이고 발왕산도 지척인 까닭에 심설산행지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산이라 한적하기 이를 데 없고 언제 찾아도 넉넉한 여유로움에 깊은 눈을 마음껏 즐기다 올 수 있는 곳을 향해 수원의 산7000 산악회와 동행을 했다.
# 백석산과 잠두산의 산행기점이 되는 모릿재
장평IC에서 벗어난 버스가 미끄러지듯 지방도로 빠져나간 지 십여분이 되어서 모릿재로 오르는 길목에 들어서자 산행준비에 다들 바빠지기 시작한다.
머리 위로 보이는 능선길에 서기 위해 중무장을 하고 빙판길이 된 임도를 따라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잘 닦인 임도를 따라 십여분을 오르자 모릿재 능선에 섰다.
비교적 낮은 고도에 위치해선지 아직까지는 걱정할 만큼의 적설량이 아니어서 가볍게 낙엽들 사이로 한걸음 한걸음 오름짓을 이어간다.
# 목마른 겨울가뭄 끝 단비의 효과
전날 새벽부터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고 출발 전날까지 확인한 바로는 비가 왔다고 했다.
산에는 당연히 눈이 왔을 거라 예상을 했지만 출발한 지 십분도 채 되지 않아 눈과 비가 혼재되어 내린 지역에서 심설산행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 줄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고도를 높일수록 온통 백설의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발 끝에 채이던 눈송이들이 발목을 덮더니 어느새 무릎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이생진 시인은 그의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서 "죽일놈의 고독과 함께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고독은 취하지 않고 결국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곯았다"고 했다.
겨울산행은 죽일 놈의 추위와 늘 함께 해야 할 숙명적 과제를 안고 있다. 생활 속에서 눈은 성가시고 힘든 대상이지만 취미 속에서 눈은 또 다른 세상을 열어준다.
의지를 갖고 추위를 이겨내며 올라선 사람들에게 전날 내린 비는 가슴속부터 눈이 되어 이곳에 흩날렸고 산은 하얀 눈꽃으로 세상을 지배한 후 사람들에게 그 겨울왕국을 열어주었으며 두 눈 부릅뜨고, 두 주먹 불끈 쥔 채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되었다.
#신설로 뒤덮인 옛 길을 찾는 힘겨운 발걸음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산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험에 의지해서 나아가야 하는 길이다. 간간이 나타나는 산악회 리본을 따라 걷다 보니 지레짐작으로 내디뎠던 발이 의외의 복병을 만나 앞으로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러셀이 되어있는 구간에선 발디딤이 양호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을 디뎠다간 영락없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쳐야 하는 수고가 뒤따랐다.
그나마 온전히 눈을 헤쳐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이 조금이나마 덜어진 까닭에 체력 소모는 비교적 덜했다.
옛 기억 속에 세 명의 산우와 찾았던 이곳은 허리까지 파고드는 눈을 헤쳐내며 지나야 했던 마(魔)의 구간이었다. 산행의 후유증으로 세 명 모두 입술이 부르트고 발가락 동상을 덤으로 가져갔던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내진 못하지만 겨울산행지로 손에 꼽을 추억을 가진 곳이다.
능선길은 비교적 걷기 수월하다고 할 만큼 평탄한 곳이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적설량으로 인해 다소의 시간을 지체한 끝에 백석산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잠두산과는 판이하게 다른 조망을 가진 백석산의 고스락은 너른 평지로 사방에 거칠 것이 없는 곳이다. 북쪽으론 계방산과 소계방산을 거친 오대산맥의 줄기와 동쪽으로 연결된 노인봉, 황병산 끝의 선자령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며 남쪽으론 가리왕산이 지척으로 보인다.
#애매한 하산길의 고민
백석산에서의 시원한 조망을 뒤로 하기란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결정이다. 시간에 구애받는 일정상 내려서야 하는 문제를 안고 고민을 해 본다.
대화3반으로 내려서는 구간이 일반적이긴 하나 가파른 돌길이 위험부담을 증가시키고, 신3리 방향의 계곡길 또한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에 능선 하나를 선택하여 길을 내었다.
어느 정도의 적설이 보장된 길이라면 신설을 뚫고 하산하는 편이 체력적으로나 물리적인 충격이 덜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백석산에서 신3리 계곡으로 내려서는 구간 못 미친 곳에서 능선에 길을 내기 시작했다.
무릎과 허벅지를 지나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을 토끼몰이 하듯 거침없이 질주하듯 헤치며 임도까지 한달음에 내려선 후 숨고르기를 하며 비로소 백설을 이고 서 있는 백석산을 올려다본다.
마치 '엘사'가 지배하던 겨울왕국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잘 차려진 밥상을 대하듯 마음껏 심설의 묘미를 충분히 즐겼던 산행이 된 잠두산, 백석산에서의 추억을 가슴에 지닌 채 신3리 마을회관에 내려선 것은 산행을 시작한 지 6시간이 지난 후였다.
# 등산로
모릿재 ~ 잠두산 ~ 신3리 하산 갈림길 ~ 백석산 ~ 대화3반 (5시간 30분)
모릿재 ~ 잠두산 ~ 신3리 하산 갈림길 ~ 백석산 ~ 신3리 (6시간)
/송수복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