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는 과정도 소설같다. 공녀로 끌려가서 황후가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총명함 그리고 야심으로 마침내 그 자리에 올라갔다.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되는 순제는 왕자 시절 원나라 정부의 내부 권력투쟁에 밀려 고려땅으로 유배를 왔다. 그 유배지가 지금 서해5도의 하나인 백령도 옆의 대청도였다. 섬 한쪽은 오로지 모래밖에 없는 황무지로 인구도 많지않은 그야말로 중국땅에서 보면 최고의 유배지인 셈이다. 그 섬에서 외롭게 10여년을 지낸 순제는 오로지 고려인들만이 자신의 따뜻한 이웃이었다. 그러다가 중국 내부의 갑작스런 환경 변화로 유배가 풀리고 북경으로 돌아가 황태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 기황후가 공녀로 끌려간 것이다.
공녀로 끌려갔을 때 그녀를 어여삐 본 황태자전의 내시에 의해 황태자를 수발하는 시녀로 발탁된 것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려땅에 유배되었던 황태자는 아름다운 고려 여인에게 그만 반해버렸다. 총명한 그녀는 빠른 순간에 몽고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 시작하였고, 황태자는 그녀의 사랑에 만족해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려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제1황태자비로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순제가 황제가 된 이후부터 서서히 고려의 문화를 원나라 황실과 고위 귀족들에게 퍼뜨렸다. 몽고의 투박스런 여성 복식과 고려 여인들이 입는 복식은 하늘과 땅이었다. 고려 여인들의 복식은 원나라 황실을 강타하였다. 황후에서부터 궁녀들에 이르기까지 고려 여인의 복식이 입혀지고, 음악과 무용 등 고려의 다양한 문화가 원나라 황실에 가득했다.
고려 문화의 전파가 원나라 사람들에 대한 고려인의 인식의 전환으로 나타났다. 이전까지 속국에 불과하였던 고려는 오히려 문화의 전수국이 되었다. 당연히 고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나타났고 고려인이었기에 황후가 될 수 없었던 기황후는 순제의 도움과 그녀 자신의 탁월한 능력에 의해 황태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리 역사에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다. 그녀가 원나라의 황태후가 된 이후 자신의 집안 사람들을 고려 조정에 중심 가문으로 키워주었고 이로 인한 권력 남용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라버니 기철은 고려 국왕보다 더 높은 권력을 휘둘렀고 그 집안의 부정부패가 고려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그래서 고려인들에게 그녀와 그녀의 집안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이 원죄를 그녀는 짊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오른 입지전적인 것은 칭송하지만 그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으면 역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지금의 권력자들 역시 권력을 얻기까지의 온갖 노력과 희생은 깊이 이해하지만 그 이후 권력남용을 하게 되면 역사의 죄인으로 평가될 것이니 이를 반드시 기억해주기 바란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