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재형 선생이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집이다. 19세기 중반에 세웠고 이후 후손들이 여러 차례 개축했다.
명소등 200여곳 역사·풍물·문화 소개… 한시 256수 주석까지 곁들여
2008년 인천학연구원 기획·김형우 교수등 번역 '심도기행' 다시 펴내


 
우리나라 답사·여행 문화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책을 꼽으라면 단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으뜸일 것이다.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역사 답사 기행이 유홍준 교수가 이 책을 처음 낸 1993년 이후 대중에 널리 퍼졌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친절하게도 답사 코스까지 그려 넣었다. '국민 필독서'가 된 이 책을 들고 너나없이 가족, 친구들과 함께 주말·연휴 여행지로 시골 문화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학생들 중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독후감을 안 써본 이들이 드물 정도다. '아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수백 수천 년 전의 자취를 돌아봤고, 먼지 쌓인 역사를 조심스레 좇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는 지금까지 350만 권이 팔렸고, 그 열풍은 현재진행형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앞서 문화유산 답사기의 '원조'가 인천에 따로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작가 유홍준에 앞서 강화에 살던 선비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이 강화의 역사와 문화, 풍물을 담은 답사기를 냈다.

고재형은 환갑이 된 1906년에 강화도 전역의 마을과 명소 200여 곳을 둘러보고 사람들을 만나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남겼다.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기고, 고향 산천마저 강탈당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기록해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고재형은 집에서 가까운 곳은 걸어서, 멀리 떨어진 마을은 말을 타고 갔다.

'산천을 일람했다'하니, 그가 강화도를 죽 훑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시 256수를 짓고 설명(주석)을 곁들여 심도기행을 엮었고, 주변에 읽혔다.

고재형의 권유로 1909년 심도기행을 손으로 베껴 쓴 구창서(具彰書)라는 이가 필사본 말미에 쓴 발문을 보면 고재형이 심도기행을 남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강도(江都)는 선비의 고향으로 고려의 도읍지였고, 학문이 번성한 곳이 아니었던가 … (중략) … 내가 그것을 몇 년에 걸쳐 읽어보니 강화부 산천의 유래와 사적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했다'.

심도기행은 인천학연구원이 기획하고, 안양대 강화캠퍼스 김형우 교수와 강신엽 전 육군박물관 부관장이 번역해 2008년 책으로 나왔다.

기자는 지난 14일 이 새로운 '심도기행'을 들고, 고재형이 걸었던 그 길을 108년 만에 따라나섰다. 강화고려역사재단 안홍민, 홍인희 연구원이 동행했다.
 
▲ 고재형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 선생의 대의를 흠모하고, 이 같은 유풍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개탄했다. 사진은 김상용 등 충신들의 위패가 안치된 충렬사.
# 고려궁지 땅속에 정말 커다란 종(鐘)이 묻혀 있을까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에 올랐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침입을 겪으며 1232년에 강화로 수도를 옮겼고 관청리에 궁궐을 지었다. 강화 고려궁은 몽골의 요구로 1270년 허물었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고려왕은 무슨 일로 도읍을 옮겨 왔나 / 연경궁과 강안전이 모두 다 허무하네 / 땅에 묻힌 큰 종을 누가 감히 꺼내겠나 / 하늘 가득 우레 소리가 곧바로 몰아친다는데'.

고재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주석에서 고려궁지가 헐리고 수백년을 이어온 구전을 소개한다. '세속에 전하기를 그 터에 종(鐘)이 묻혀 있다고 하는데 발굴하려 하니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고 한다'.

고려궁지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지지 못한 곳으로 남아 있고, 주변에 건물이 많아 대대적 발굴조사는 불가능하다.

고려궁지에서 나와 강화북문에 이르는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산책로다. 북문 통로를 지나 오읍약수터 방향으로 두 갈래 오솔길이 나있다.

산성 위에 올라가면 멀리 바다를 볼 수 있다. 특히 봄과 가을에 절경이다. 북문 누각에는 '진송루(鎭松樓)' 편액이 있다. 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명명한 것이다. 고재형은 여기도 빼놓지 않았다.

'진송루 성문 아래서 한참을 머물러 보니 / 산은 고려산에서 굽이쳐 흘러왔고 / 눈 아래는 일천 채의 초가집과 기와집 / 연기 그림자 속에 절반이 티끌이네'.

강화북문 밑에는 철종이 임금이 되기 전 머물렀던 용흥궁(龍興宮)이 있다. 용흥궁 앞 골목 식당에서 강화 전통음식인 젓국갈비로 점심식사를 하고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로 향했다. 병자호란, 신미양요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절한 충신들의 위패 28위가 모셔져 있다.

관리인 이성노(70) 씨는 "매해 음력 10월 중정(中丁)날에 제향을 한다. 평소에는 후손과 학생들이 종종 찾아온다"고 전했다.

제단 아래 방명록을 보니,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일죽(一竹) 이돈오(李惇五) 선생 등의 후손이 다녀갔다고 되어 있다.

고재형은 목숨으로 항거한 김상용, 이돈오 선생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목욕재계한 뒤 몸을 바르게 하고 앉아 한 글자 한 글자씩 조심스럽게 기록했을 것이다.
 
▲ 1 고려궁지에서 본 강화읍내. 고재형은 '고려궁지터 4~5리의 안에 담장, 산재한 주춧돌, 붕괴된 기와, 깨진 옹기 등이 밭 사이에 쌓여 있다'고 기록했다. 2 조선시대 연미정에 오르면 삼남지방에서 온 수많은 조운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게 큰 볼거리였다고 한다. 3·4 심도기행 옛 표지와 본문. 심도기행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않았고 현재 필사본 2종이 남아 있다.
# 심도기행 따라 난 강화나들길

심도기행길 답사는 지루하지 않다. 역사적 사건뿐 아니라 인물과 풍속, 멋진 풍광이 고루 담겼다. 책을 보면서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화는 아직도 옛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많다.

고재형은 열무당 앞쪽에 큰 시장이 매월 2일과 7일에 선다고 했는데, 현재 강화중앙시장 자리다. 사람 냄새가 가장 진하게 난다는 시장은 100년의 세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강화읍 월곶리 연미정에 간 고재형은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 삼남지방 조운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라고 읊었다.

연미정에는 아직도 5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북녘과 한강, 임진강, 염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풍광은 수려하기 그지없다.

2005년부터 심도기행을 강독하고 그 길을 여러 번 답사한 이들이 2009년에 '강화 나들길'을 만들었다. 현재 15개 코스가 나 있다.

강화 출신으로 나들길 개발에 앞장선 강화 남궁내과의원 남궁호삼(59) 원장은 "100년 전 심도기행길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고, 마을 역사도 보통 500년이 넘어 후손들이 계속 살고 있다"며 "나들길을 걸으면서 강화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불은면 두두미마을에 고재형 생가가 있다. 이 곳에서 고재형의 5대 종손인 고승국(64) 울산대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후손이라고 하지만 심도기행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그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며 "이 책을 잘 정리해서 일반인들도 쉽게 알 수 있게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글 =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