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어권 국민들의 영어 열공(熱工) 배후에는 세계화가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외연적 확대는 냉전시대를 청산했다.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경제적 자원의 국제적 이동성을 높인 때문에 지구촌의 요소생산성이 제고된 결과 세계인들이 물질적 풍요의 혜택을 누린 것이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의 그늘(=장기불황)은 더욱 짙어졌는데 분배문제가 결정적이다. 특히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국내외적으로 빈부격차는 훨씬 심해졌다.
최근 미국에는 민간소비 훈풍이 감지되고 있으나 정부의 고민도 깊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산업지형에 반갑지 않은 변화가 감지된 것이다. 중산층 산업이 쇠퇴하고 럭셔리 및 대체재 산업이 점점 비대해지니 말이다. 지난 3일 세인트루이스 연방은행이 발표한 "2012년 미국 전체 소비의 38%를 소득 상위 5%인구가 담당했다"는 내용이 상징적이다. 유럽과 일본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동소이하다. 민간소비의 핵인 중산층이 무너져 내리면서 저성장체제가 장기화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상위 0.1% 사람들이 모이는 다보스포럼의 금년 주제가 양극화문제인 지경이다.
국내적으로 성장문제, 주거문제, 사교육문제, 수출경쟁력문제 등이 산적했으나 부(富)의 편재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소득분포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353으로 위험수준(0.4)에 육박할 뿐 아니라 OECD 34개 회원국 중 6번째로 높다. 지난 한 해 동안에 10만 명이 새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생계형 창업의 80%가 불과 1, 2년 만에 사업을 접는 실정이니 말이다. 과거 봉건사회에서도 지금처럼 분배불균형이 심한 적은 없었다는 지적이다. 불황형 장기침체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계화와 디지털화(=기계화)가 초래한 결과이다. 작금의 디지털화는 단순히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 지능까지 대신하는 지식집약형 기계화인 것이다. 빌 게이츠, 주커버그, 스티브잡스 등 극소수의 앙트레프리너와 혁신기술자들에 부가 집중되는 '지식의 지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반면에 후진국으로의 끊임없는 생산거점 이전 탓에 절대다수인 비숙련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높은 실업률, 임금 하락 등 혹독한 시련의 계절을 맞았다. 국내의 경우 1991~2007년 사이에 연평균 1만1천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한국은행의 연구에 눈길이 간다.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 권리와 실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가진다"는 세계인권선언의 제23조는 빛이 바랬다. 만인을 위한 자유주의질서와 평화와 번영이란 세계화의 비전도 실현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닐 퍼거슨 교수는 무역과 기독교를 앞세운 미국식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단정했다. 국제공용어로 영어의 비교우위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또한 미숙련 노동력의 위상 악화는 불문가지여서 국제공조를 통한 세계경제 시스템 개선이 유효한 해법이나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각자 호랑이굴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서울 강남의 젊은 엄마들이 모태영어도 모자라 젖먹이들을 닦달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언어제국주의는 언감생심이고 영어공용화가 대세인 것 같아 씁쓸하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