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젖어
마지막 부자 최준 전재산 대학설립 기부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득의담연(得意淡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실패했을 때는 태연히 행동한다
-최부자집 육연(六然, 자신을 지키는 교훈)
경주를 떠올리면 누구나 다 고분들과 석불들을 먼저 떠올린다.
아무래도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 가본적이 있는 천마총과 불국사, 석굴암 등의 문화재들 때문일 것이다.
경주는 신라의 도읍이기도 했지만 신라가 멸망한 후에도 경상도 지역의 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지역으로서 역할을 다해 온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경주를 대표하는 몇몇 유적지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신라와 불교 외에 다시 문화재들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한국근현대 시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경주 최부잣집에 대한 이야기로 경주의 또다른 모습을 들여다 볼까한다.
대릉원과 반월성을 찾게 되면 첨성대와 계림을 둘러보고 안압지로 향한다.
하지만 발길을 계림에서 안압지로 돌리지 않고 계림 숲속 뒤편으로 5분여간 걸어가면 신라의 수도 경주라는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한옥 마을 교동을 만나게 된다.
교동은 신라때 학교시설인 국학이 있었던 마을로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그 국학 터에 향교를 지었다.
이 교동 마을 끝자락에는 신라시대의 석교인 월정교가 복원 되어 여행자들을 맞고 있고 마을 한쪽에는 널뛰기를 비롯한 전통놀이들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져 있다. 여행자마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은 교동의 담장길이다.
성인 어깨까지 올라와 있는 담장들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거닐면 일상에서 받던 스트레스와 복잡한 생각들을 잊게 해 준다.
그리고 담장 너머에 보이는 작은 텃밭에서 자라는 여러가지 식물들을 보며 고풍스러움과 자연의 어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좋다.
■170여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최씨 고택
중요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 되어 있는 최씨고택은 현재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한옥이다. 그렇다 보니 최근까지도 집을 손본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고, 또 사람들의 관람을 위해 수리한 곳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어우러져 있다.
현재의 최씨 고택은 약 170년전의 건축물인데, 평면구조는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최씨 고택은 교동에 있는 여러채의 한옥 중에서 위엄 있어 보이는 솟을대문으로 인해 한눈에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작은 정원과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 주변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사랑채 뒤편에 위치한 안채는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색적인 건 가운데에 장독대가 자리한 모습이다.
최씨 집안에는 재미있는 전통이 있는데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도록 자손들을 교육했다.
또한 며느리에게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해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밸 수 있도록 했고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특히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지 않도록 가르쳤다.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이 대략 3천석 쯤이었다고 하는데 1천 석은 집안에서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었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줘 농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신돌석 장군과 최익현 선생, 의친왕 이강이 머물러 갔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최씨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崔浚·1884~1970)은 백산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해 독립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최준은 해방후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사용하기 위해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재단에 기부한다.
/김종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