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박성현기자
김소월·정지용·김기림 등 유명 시인들 작품 배경으로
외로움·이별·활기 등 각각의 시선 다양한 공간 표현
쉽사리 상상 힘든 해녀 이야기도 전해져 '신선'
한국 미학 선구자 고유섭 등 경인선이 문화역량도 키워


우리나라 현대 시(詩)는 언제부터 그 틀이 갖춰졌을까.

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시가 시의 격조를 갖춘 시기는 1920년대라고 말한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시다운 시가 나왔고, 또한 이름난 시인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종호 회장은 그 이전 시기의 시는 '습작'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1920년대 이후 등장한 시에 인천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김소월, 정지용, 김기림, 김동환 등 당시 유명 시인 대부분이 인천을 배경으로 한 시를 남겼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시인의 눈에 따라 인천은 외로움이 사무치는 곳이 되기도 하고, 활기가 넘치는 역동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또는 이별의 한이 묻어나는 곳이 되기도 했다.

인천에도 제주도처럼 해녀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다는, 지금 입장에서는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당시 시를 통해 읽을 수 있다.

따라서 1920~30년대 시 속에 담긴 인천을 살피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1920년에는 현재 중부경찰서(사진 오른쪽 하단) 자리에 사람이 타고 내리는 배가 닿는 부두가 있었다. 이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이 곳은 유명 문인들의 영감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임순석기자
# 시대를 풍미한 시인들의 놀이터, 인천

서울에 터를 잡았던 유명 시인들도 경인선 개통과 함께 인천과 가까워졌다.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는 "경인선을 타고 온 시인들은 종착역인 '인천역'에 내려 중구 일대를 둘러봤고,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며 "현 중부경찰서 자리에는 여객선이 드는 부두가 있었고, 세관은 중부서 앞쪽 도로쯤에 있었다. 또 8부두에는 어선만 닿았다. 당시에는 개항장 '제물포'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 일대를 인천보다는 제물포라는 지명으로 불렀다"고 전했다.

김소월(1902~1934)이 1922년 2월 '개벽(開闢)' 20호를 통해 발표한 시 '밤'도 제물포를 그리고 있다. '밤'의 처음 제목은 '제물포에서 밤'이다.

홀로 잠들기가 참말 외로와요 / 맘에는 사무치도록 그리워와요 / 이리도 무던히 / 아주 얼굴조차 잊힐 듯 해요

벌써 해가 지고 어두운데요 / 이곳은 인천에 제물포, 이름난 곳, / 부슬부슬 오는 비에 밤이 더디고 / 바닷바람이 춥기만 합니다. (후략,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

김소월은 제물포에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극대화시켰다. 한국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진달래꽃'에서 풀어낸 이별과 헤어짐에 대한 절절함이 어두운 밤, 비 내리고 바람 부는 제물포에서도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모더니즘 시인의 대표격인 정지용(1902~1950)은 총 4편의 시에서 인천과 강화를 등장시킨다. 이중 '슬픈 인상화(印象畵)'에서 그려낸 인천은 김소월의 '밤'과 비슷한 모습이다.

침울하게 울려 오는 / 축항의 기적소리… 기적소리… / 이국정조로 퍼덕이는 / 세관의 깃발. 깃발. (…중략…)

아아, 애시리(愛施利) · 황(黃)! / 그대는 상해로 가는구료…… (1926.6·학조,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

문학평론가 김용희는 '정지용 시의 미학성'에서 "'가는구료'에 이어 나오는 말없음표에서 명확하지 않은 불안정하고 서러운 감정의 흔들림이 보인다. 또 가고 있는 움직임을 하나의 무심한 풍경처럼, 하나의 인상화처럼 객관화 시키려고 하지만 붙잡을 수도 보낼 수도 없는 만남과 이별의 이중적 비밀과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필연적 법칙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정지용이 비슷한 시기 쓴 것으로 보이는 '내 맘에 맞는 이'에서의 인천은 밝다. 여기에는 '홍예문'이 등장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소다.

감각적 시어 사용이 돋보이는 김기림(1908~?)은 '길에서-제물포 풍경'(1936.3·조광)을 남겼다. 연작시 형태인 이 시는 경인선을 타고 인천역에 내려 항구을 둘러보고 다시 인천역으로 돌아와 상행선을 기다리는 '여행과정'을 담고 있다.

사용된 시어들이 함축적이고 독특해 이해가 쉽지 않지만 '메이드·인· 아메-리카의 성냥개피', '사공의 포케트', '부끄럼 많은 보석장사 아가씨' 등의 표현으로 당시 인천을 통해 들어온 해외 문물과 문화,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한 인천항 풍경을 엿볼 수 있다.
 
▲ 현 월미공원 자리는 1920년대 마을이 있던 곳이다. 당시 월미도는 매립이 이뤄지지 않아 완전한 섬 형태였고 주변에는 갯벌이 있었다. 김동환은 '월미도 해녀요'에서는 당시 월미도에 해녀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 민족 해방을 갈구한 시인들이 그린 인천

파인(巴人) 김동환(1901~?)과 여수(麗水) 박팔양(1905~?)은 사회주의 성향의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계 문인으로 활동하면서 인천 관련 시를 남겼다.

최현식 인하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파인과 여수는 큰 틀에서 카프계 시인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사상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컸다"며 "하지만 둘의 성향은 매우 다르다. 김동환이 민족, 농촌문제에 집중했다면 박팔양은 계급, 도시 문제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고 평가했다.

늘 저물 때마다 멀어지네 내 집은 / 한 달에 보름은 바다에 사는 몸이라 /엄마야 압바가 그리워지네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

김동환이 쓴 '월미도 해녀요'는 1927년 2월 1일 인천에서 창간한 문예잡지 '습작시대' 제1호에 실렸다. 그는 인천에서 어촌을 만나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 월미도는 매립사업으로 바다 방향으로 크기를 넓혔다. 현재는 이 곳에서는 카페, 횟집, 놀이공원 등이 들어서 예전처럼 관광지로 존재하고 있다. 사진은 항공에서 내려다본 월미도. /경인일보 DB
이 시에 나타난 월미도는 지금과는 천양지차다. 김동환이 본 월미도와 9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의 월미도는 얼마나 다를까. 지난 3일 찾은 월미도는 관광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횟집과 카페, 놀이기구가 길게 늘어서 있고, 관광안내소와 전망대, 유람선 선착장이 시선을 끈다. 김동환이 시에서 그린 산호를 한 바가지 캐낼 곳도, 해녀의 발자취도 찾을 길 없었다.

월미도가 고향인 이범기(82) 씨는 김동환이 '월미도 해녀요'에서 말하듯이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린 '월미도 해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동네 어르신 중 몇몇 분이 과거 해녀 일을 하셨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월미도 마을 주변은 온통 갯벌이었는데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질 때는 조개를 줍고, 물이 차면 나룻배를 띄워 인근 섬으로 물질을 나가는 식이었다고 했다"며 "배 크기가 다양해지고 수가 늘어나면서 해녀는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박팔양의 '인천항'(1927.2·습작시대)은 당시 국제항으로 활약한 인천항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 특히 현실성과 서정성의 갈등, 통합에 기조를 둔 박팔양의 특색이 인천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만나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조선의 서편항구 제물포 부두. / 세관의 기는 바닷바람에 퍼덕거린다 / 잿빛 하늘, 푸른 물결, 조수 내음새, / 오오, 잊을 수 없는 이 항구의 정경이여. (…중략…)

어제는 Hongkong, 오늘은 Chemulpo, 또 내일은 Yokohama로, / 세계를 유랑하는 코스모포리탄 / 모자 빼딱하게 쓰고, 이 부두에 발을 나릴 제, (…후략, 시 전문은 경인일보 홈페이지)
 
▲ 1950년 한국전쟁 이전 월미도 내 마을 전경. 삼삼오오 모여 있던 집들과 조탕, 호텔 등은 인천상륙작전 등 포격으로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1920년대는 인천을 찾은 유명 문인들이 꼭 들러가는 관광지였다. /경인일보 DB
# 애향심이 바탕된 예술가의 인천 노래

한국 미학의 선구자 고유섭(1905~1944)은 인천 사람이다. 그도 인천을 노래했다. 고유섭이 남긴 시 '경인팔경(京仁八景)'과 '해변에 살기'는 고향인 인천을 향한 애정, 순수한 표현, 당시 인천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로 높은 평을 받고 있다.

이 중 '경인팔경'(1925년·동아일보)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로 활동한 고유섭이 경인선을 타고 통학하며 본 경치를 그린 것이다. 경인선 개통 초기 주안은 소금밭이 있었고, 부평은 평야였는데 경인팔경은 이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지금도 인천과 서울을 잇는 전철이 있지만 창 밖의 풍경은 다르다. 인천, 동인천, 주안, 부평할 것 없이 빽빽한 주택과 허름한 상가가 창을 가득 채운다.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일제 군사적 목적 아래 만들어진 경인선이 예상 밖으로 인천 문화 역량을 키웠고 그 중심에는 경인기차통학생들이 있었다"며 "문학과 도시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다. 이국적, 이색적, 향토적 정취가 고루 가득한 인천에서 고유섭과 같은 걸출한 문인이 탄생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글 = 박석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