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
근대 이후 많은 만화가 우스개와 판타지로 대중들을 위로했다. 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상상력은 현실에 지친 우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만화방의 낡은 의자로 기어들어가 한가득 만화를 쌓아놓고 어쨌거나 승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때, 비련의 여주인공이 슬픈 사랑을 함께 할 때, 말도 안 되는 말썽을 피우는 또래 친구를 볼 때 현실의 우울함과 따분함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좀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면의 슬픔이나 고민을 꺼내 놓았고, 다양한 지식을 풀어 놓기도 했다. 피안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들어온 만화는 독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1946년생, 쉰다섯살인 다비드는 자신을 떠난 아내 율리아와 사이에서 큰딸 미리암을 두었고, 파울라와 재혼해 둘째 딸 타마르를 둔 그는 후두암 진단을 받는다. 오랜 친구인 의사 조르지에게 다비드가 말한다. "타마르는 어쩌지? 이제 겨우 아홉 살인데…."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스물다섯살 큰딸 미리암, 아홉살 둘째 딸 타마르, 서른여덟 살 부인 파울라를 거쳐 다시 다비드의 시점으로 돌아오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아버지 다비드가 후두암 진단을 받고 난 다음, 미리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000년 4월 미리암은 베를린에서 홀로 그녀의 아이 루이즈를 낳는다. 아이를 낳아 집으로 돌아온 미리암에게 다비드는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암에 걸려 화학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타마르가 듣게 된다. 모든 가족이 동물원에 간 자리에서 미리암은 파울라에게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말한다. 그러자 파울라가 말한다. "벌써 석 달이나 지났어! 치료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화학 치료는 끝났고 방사선 치료가 두 번 남았어. 이틀만 더 지나면 끝이란 말이야!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야?" 미리암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말한다. "실은 한 달 전에 알았어요. 하지만 말 꺼내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만화는 이들 가족의 균열을 보여준다. 그 균열은 다비드 가족만의 것은 아니다. 언젠가인지 모르겠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받고, 벌어진 틈을 메우지 않고 살고 있는 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한국어판 제목은 '아버지가 목소리를 잃었을 때'이지만, 원제는 'Toen David zijn stem verloor'로, '아버지'가 아니라 '다비드'다.

둘째 딸 타마르와 단 둘이 여행을 다녀온 다비드는 어린 딸 앞에서 쓰러진다. 치료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암은 여러 곳으로 전이되었다. 타마르의 친구 맥스는 '미라를 만들거나', 아니면 '영혼을 병에 담는' 방법을 타마르에게 제안한다. 다비드의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길어야 6개월. 파울라는 곧 닥칠 다비드의 부재를 두려워 한다.

그리움과 두려움 등은 조금씩 그들을 서로에게 기대게 한다. 구태여 대사나 해설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들의 마음을 읽는다.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1인실에 입원한다.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비드다. 결국 후두의 종양이 식도를 누르게 되어, 후두를 제거하게 된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다비드의 병실로 미리암의 아들 루이즈가 찾아온다. 어느 날 밤, 모르핀에서 깨어난 다비드는 파울라에게 메모를 남긴다. '내 손의 기운이 다 빠져 버리기 전에 말하고 싶어. 사랑해….' 다비드는 친구 조르지에게 부탁해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다.

단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나를 돌아보고, 서로를 돌아보며 인식하지 못했던 균열을 받아들이고 그걸 메워가는 치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비드의 죽음과 루이즈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죽음과 탄생, 탄생과 죽음의 윤회처럼.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