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네 어르신의 찬 손을 어루만지는 민영환 신부의 손길이 부드럽기만 하다.
불혹지년(不惑之年)'.
공자가 나이 40세가 되면 세상 일에 미혹하지 않았다 해서 쓰인 말이다.
40세를 앞두고 있는 민영환(39)신부는 인천시 남동구 만수3동 성당의 사제다. 미사만 없으면 로만칼라보다 캐주얼 차림을 즐겨입는 젊은 신부. 까까머리 중학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니던 간석2동 성당에서 만난 외국인 선교사의 헌신적인 봉사를 흠모하던 그도 이제 어느덧 중년의 사제가 됐다.
달동네 사람들의 터전인 만수 2, 3동의 만월산 아래 '향촌마을' 신부로 그가 처음 부임한 것은 지난 2월께. 이 판자촌에 한창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아파트가 지어지면 시세 차익을 거두어 보겠다는 얄팍한 투기꾼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조용하던 마을 사람들의 보금자리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투기 열풍이 온동네를 휘감으면서 인심마저 흉흉해 졌다.
대학수능시험이 치러졌던 지난 7일 민신부가 남동구 만수3동 100의10 달동네에 사는 신도 김영희(86)씨와 김확실(78)씨 노부부를 찾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이들 노부부는 누더기처럼 판자를 짜깁기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낡은 집에서 단 둘이 산다. '하늘 아래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젊은 신부가 이집을 찾은 것은 한달전 성당에서 놓아준 연탄보일러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난생처음 보일러의 뜨끈한 맛(?)을 본 할아버지는 너무 좋아서 아예 따뜻한 안방을 독차지 한채 방을 나서지 않는다고 했다.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처절한 가난. 바로 그 가난이 눈앞에 생생했다.
병을 절대로 앓지 말라며 아버지가 '확실'로 이름을 지어줬다는 할머니는 젊은 신부를 보자마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곤 “1·4후퇴때 피란와서 인천의 독쟁이고개에 정착했으나 가난때문에 줄곧 이곳까지 80평생을 판자촌 만을 전전해 왔다”면서 “이곳에서 또다시 쫓겨난나면 더이상 살아서 뭣 하겠냐”고 덧없는 인생을 넋두리했다.
이렇게 민신부는 이 판자촌에서 쫓겨 날 운명에 처해 있는 불쌍한 주민들을 찾아 위로하고 기도하는 게 요즘 가장 마음쓰는 일이다. 향촌마을은 현재 약 2천500여세대의 도시빈민들이 모여 산다. 이 곳은 지난 70년대 인천의 송현동이나 독쟁이 판자촌에서 쫓겨 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달동네.
인근 만월산을 뒤로하고 겨우 어른 한사람이 지나갈 만큼 꼬불꼬불하게 난 골목길이 60~70년대 빛바랜 흑백사진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모습이다. 빼곡히 들어선 빛바랜 낡은 기와집들 사이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판잣집이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어 어렸을 적 머리 한복판에 생긴 기계충을 연상시킨다.
대한주택공사는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위해 내년말부터 이 판자촌을 밀어 버리고 2천700여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지을 예정이란다.
그러나 아파트를 장만할 경제적 능력이 없는 대부분의 동네 주민들은 당장 길거리로 나앉아야 할 판이다. 그래서 젊은 사제는 지금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그는 “만일 가난한 주민들이 삶의 터를 힘없이 빼앗긴다면 성당 마당에 천막을 치고서라도 이들과 함께 싸우겠다”고 하면서도 “우선 급한 것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학교다닐 때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어린 민영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가치있는 삶을 살 것인가'였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는 노동운동에 투신해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 했다. 그는 얼마전 교계에선 처음으로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오로지 가난에 지친 이 향촌마을 빈민들을 위해서였다.
혼자선 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성당 신도들 가운데 뜻이 같은 자원봉사자를 받아 차량지원팀과 교육행정팀, 가사지원팀, 간병팀, 주거개선팀 등 5개 분야로 나눠 본격적인 지원 활동에 나선 것이다. 성당에서도 지난 8월 처음 고용한 사회복지사를 보내줘 뜻있는 신도들과 함께 품을 나눠 이들을 돕도록 배려했다.
이 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임도원씨는 “이 일을 시작한 뒤 신도들이 젊은 신부님을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며 “교계 차원에서 시범적으로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한 것인만큼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할 것”이라고 의지를 불태웠다.
젊은 신부의 어렸을 적 꿈은 원래 교사였다. 그래서 교사자격증까지 따고 가톨릭 계통의 대건고등학교에 자원했지만 자리가 나지 않아 꿈을 미뤘다. 그렇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다시 교단에 설 생각을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미련때문에 그는 지금도 틈만 나면 성당의 청소년과 함께 볼링을 치거나 영화구경을 가는 등 함께 어울리고 있다.
부모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살다보니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돼 있는 아이들에게 기울이는 그의 손길이 더욱 애틋하다.
그는 “향촌마을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