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박성현기자/아이클릭아트

의적으로 거듭난 임꺽정
부평 계양산 자락서
새로운 세상 꿈을 꾸다

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는 인천
사납기만 했던 양주 백정의 아들
새삶 다짐 '계양산' 성장기 주요 배경
징매이고개 등 주변에 도적 많았던 탓
인근 주막 늙은이에게 검술 배워


소설 임꺽정과 관련 인천 인물
허암산에 갓바치 스승 정희량 흔적
이지함·이규보도 스토리상 거론
저자인 홍명희는 부친 영향 '독립운동'
신문사 사장 역임·신간회 결성 주도


임꺽정은 조선시대 양주(楊州)의 한 백정에게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놈'인데, 외조모가 장래의 걱정거리라며 '걱정아, 걱정아'라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누나(섭섭이)가 외조모 흉내를 내어 '꺽정이'라고 부른 것이 이름이 됐다. 그래서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사납고 심술스러웠다. 글공부를 싫어하고 달음질과 뜀박질 등 노는 것을 좋아했다. 힘이 장사였다. 이런 임꺽정이 '의혈 남아'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 공간이 당시 인천 부평에 속했던 계양산이다. 임꺽정은 계양산 기슭 주막에서 어떤 늙은이로부터 검술을 배운다.

이후 임꺽정은 청석골 화적패의 대두령이 된다. 오양호 인천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는 "소설 임꺽정은 계급적 관점을 기본 내용으로 해 민중의 저항성이 강조된 역사소설"이라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천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임꺽정이 앞날을 준비하는 구원의 공간이란 의미"라고 했다.

▲ 임꺽정이 늙은이로부터 검술을 배웠다는 계양산 전경. /임순석기자
# 소설 임꺽정과 인천 공간


망나니처럼 뛰놀기만 하던 임꺽정은 양주 어물도가(漁物都家)에서 인천 부평 구슬원(球瑟院) 인근에 검술을 잘하는 화적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검술을 배우고 싶은 생각으로 무작정 양주를 떠나 부평을 찾아간다.

서울을 비켜놓고 한강 하류를 건너 김포 땅에서 남으로 내려오는데 구슬원 길을 물어 나오기는 양주서 떠나던 이튿날이었다. 무인지경 숲 속 길을 들어섰다. 숲이 크거나 길지는 아니하지만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까닭에 대낮에도 길이 어둠침침하였다.(소설 임꺽정 피장편 中)

구슬원은 조선시대 여관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부평도호부 북쪽 10리 되는 곳에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계양산 북서쪽인 서구 방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위치를 눈대중으로라도 잡아보기 위해 지난 8일 계양산 정상에 올랐다. 계양구 일대와 김포가 한눈에 들어왔다. 임꺽정은 계양산 자락 어디쯤에서 검술을 익혔을까.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임꺽정은 구슬원을 찾던 중 외딴 주막에서 늙은이를 만나게 된다. 이 늙은이가 바로 검술을 잘하는 화적이었다. 임꺽정은 까닭 없는 미움과 쓸데없는 객기로 칼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늙은이에게서 검술을 배운다.

임꺽정이 인천 부평 땅 계양산 인근 주막에서 검술을 배운 기간은 1년 반 정도. 짧은 기간이지만, 이때 배운 검술은 향후 임꺽정이 청석골 화적패의 대장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된다.

만일 임꺽정이 계양산 인근 주막에서 검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임꺽정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의 성장 과정에서 의미 있고 중요한 공간을 하필이면 왜 인천 부평 땅 계양산으로 설정했을까.

산을 내려오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뾰족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인천 설화 모음집과 부평사(富平史)에 나오는 것처럼 계양산 주변에 도적이 많았기 때문일까.

계양산은 높고 산림이 우거져 도적들이 은신하기 좋고, 산 주변에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부자들에게 빼앗을 것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개성과 한양 가는 길목인 경명현(징매이고개)은 도둑이 많아 1천명이 모여 집단을 이뤄야 산을 넘을 수 있다는 뜻에서 '천명고개'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소설 임꺽정 의형제편 '결의'를 보면, 박유복과 서림이 달골을 떠나 청석골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인천 소래산과 미라원(彌羅院)이 등장한다.

인심이 소동되고 기찰이 심하여지는 것을 보고 서울길을 피하고 안산으로 작로하여, 안산 오자산과 인천 소래산 줄기를 밟아나와서 인천 미라원 적당의 연신 있던 사람을 찾아서 만나가지고 배를 주선해 달라고 청하여 풍덕 조강까지 배를 타고 와서 청석골로 돌아왔었다.

이는 인천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남정맥'을 따라 갔다는 것으로, 아마도 박유복과 서림이 소래산, 계양산을 거쳐 문수산까지 온 뒤 김포 조강포에서 배를 탄 것으로 보인다.

김포시사(金浦市史)를 보면 고려와 조선시대 때 월곶면 조강리 일대에 나루터가 있었다. 인천 미라원은 구슬원 서쪽에 있었던 여관이라고 한다.

# 소설 임꺽정과 인천 관련 인물들


소설 임꺽정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온다. 이 중 갖바치(양주팔) 스승인 허암 정희량, 임꺽정과 갖바치가 제주도 가는 길에 동행한 토정 이지함은 인천과 관련이 있다. 고려 문인 이규보도 잠깐 거론된다.

허암 정희량(1469~?)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1492년 초시과거에 장원급제해 생원이 됐다. 모친상을 당해 시묘를 하던 중 1502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김포 강변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자취를 감추고 죽은 것처럼 가장해 허암산에서 은거했다고 서구사(西區史)는 설명한다. 서구 검암동 허암산 북쪽(서인천고등학교 앞 도로 맞은편 부근)에는 '허암지'가 있다. 정희량이 은거했던 암자가 있던 자리로, 지금은 터만 확인될 따름이다.

현재 이곳에는 정희량 시비와 허암차샘이 있고, 주변은 고급 빌라촌으로 변모했다. 정희량은 소설 임꺽정에서 몇 마디 주문으로 여우 같은 짐승을 죽게 하고, 자신이 죽는 날까지 예언하는 신비의 인물로 나온다.

토정 이지함(1517~1578)은 조선 중기 문신이다. 이지함은 소설 임꺽정에서 갖바치 친구인 심의(1475~?)와 관계가 두터운 화담 서경덕(1489~1546)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지함이 인천에서 상을 당한 제자 중봉 조헌(1544~1592)을 조문했는데, 그날 밤 요사한 혜성이 하늘에 뻗쳤다. 이지함은 조헌에게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해도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라고 했다.

이 말이 임진란(壬辰亂)에 이르러 부합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헌은 임진왜란에 대비해 인천 율도를 개간한 뒤,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을 율도로 보내놓고 자신은 금산전투에서 싸우다 순국했다.

고려 때 문신인 이규보(1168∼1241)의 경우, 소설 임꺽정 피장편에서 신임 부평부사가 계양산 도적의 존재를 알게 되는 장면에서 잠깐 거론된다.

부평부사가 나이 젊은 탓으로 동헌에 들어앉았기가 갑갑하여 고려 이상국(李相國·이규보)의 놀던 자취를 찾아 계양산 명월사(明月寺)에를 올라가려 하니 이방이 부사 앞에 나아가서…(생략)

저자 벽초 홍명희를 따라가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인천 인물과도 만나게 된다. 벽초는 충북 괴산 출신으로, 아버지 홍범식(1871~1910)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했다.

신문사 편집국장과 사장을 지내고,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민주독립당 대표를 맡았으며,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뒤 북한에 남아 81세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마흔 살이 넘어 '조선일보'와 '조광'지 등에 임꺽정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홍명희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함께 조선의 3재(三才)로 불린다.

임꺽정전 연재 기간이 길다 보니 삽화를 맡은 화백도 여러 명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임꺽정전 삽화를 그린 이 중 한 명이 정현웅(1910~1976)이다.

정현웅이 동아일보에 근무할 때 인천에서 성장한 이길용(1899~?) 기자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이 벌어진다.

이길용은 정현웅에게 사진 수정을 부탁했다. 정현웅은 점심을 먹고 일장기를 지울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옆자리에 근무하던 청전 이상범이 대신 일장기를 지웠다. 이 사건으로 이길용과 이상범은 옥고를 치르게 됐고, 정현웅도 동아일보에서 해직됐다.

글 =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