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채우 수필가·국제뇌교육대학원 교수
전 사회에 만연된 무자비한
약육강식·승자독식 시스템
맹수는 배 부르면 사냥 멈춰
생태계 균형 유지되지만
인간의 탐욕은 한없어
자연계보다 더 잔인해질 수도


해가 바뀐 것이 엊그제 같건만 우수 경칩도 다 지나고 어느덧 밤낮의 길이가 같다는 봄의 한가운데 춘분이 다가왔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십여일전 아침에는 기러기떼들이 삼각편대를 지어 북녘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겨우내 이 땅에서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피해 한철 잘 쉬었다가 떠나던 참이었을까? 아니면 호젓한 호숫가 들녘도 미세먼지와 AI소동에 더 견디지 못하고 먼 귀향길을 서두른 것이었을까?

강호뿐 아니라 인간세상도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최근 모 TV방송사의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성이 압박감에 못이겨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으로 여론이 시끄러웠다. 경찰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고, 앞으로 사법부의 공정한 판단이 내려지겠지만,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연출진들이 고의로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려 했을리야 만무하지마는, 아마도 시청률 경쟁이란 괴물이 멀쩡한 출연자들을 궁지로 내몬 배후일 것이다.

또 얼마 전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단역 배우 한 분이 일용직 노동판과 월세방을 전전하다가 스스로 생을 접었다. "그쪽 방향에서 출세한 사람이 천 명에 하나, 만 명에 하나뿐이 안되잖아요. 그냥 싫은 거예요, 세상이…." 유족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란 99% 대 1%란 말이 아닌가? 텔레비전을 켜면 1% 소위 스타와 인기연예인들의 화려한 모습들로 도배하고 있다. 이제는 운동선수들도 이 스타시스템에 편승하려 얼굴을 내민다. 피와 땀으로 일군 인간승리의 감동보다는 부와 명성을 얻는 편한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누가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타시스템의 문제는 영광스런 1%의 아래에는 99%의 그늘이 짙게 깔려있고, 스타라는 절대강자가 파이를 독식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TV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드리워져있는 명암이다. 운동선수와 연예인은 모두 초등생의 장래희망 3위안에 드는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은 우리 현실에서 악몽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이런 시스템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물려줘도 되는 것일까?

무자비한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시스템은 전 사회에 만연해있다. 맹수는 제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계의 평형은 유지된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한정이 없다. 그래서 인간사회는 자칫 자연계보다 더 잔인해질 수 있다. TV를 켜면 꿈같은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TV를 끄면 자신의 현실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늘이란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법이다. 국민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우리나라는 성범죄율 세계 1위일 뿐 아니라 자살률도 세계 1위라고 한다. 최근 가족간에 동반자살을 한 사건이나 빈곤속에서 홀로 고독사한 사건들도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조용한 아침의 나라'나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이런 어둔 그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부끄런 일이 아닐 수 없다.

99% 대 1%의 격차는 다른 곳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되었다. 얼마전 여론조사를 실시해보니, 전국민의 47%가 사회 경제적으로 하류층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류층이라고 답한 비율로는 역대 최고의 수치란다. 거기에 비해서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2%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상·중·하층이 적절하게 표준분포곡선을 그려야 할 터인데, 상류층만 2%이고, 나머지 98%는 중·하류이다. 99대1 혹은 98대2라는 비율이 실상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는 국민들 각자가 느끼고 있는 상대적 빈곤감·박탈감이 만들어낸 감성적 수치이겠지만, 참으로 공교롭고도 불안스런 형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빛과 그림자, 밤과 낮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상생한다. 춘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정음(正陰) 정양(正陽)의 절기이다. 왕은 이날 동쪽 교외에 나아가 떠오르는 태양에 제사하면서 우순풍조와 국태민안을 기원했다고 한다. 춘분절을 바라보며 우리 사회도 빛과 그늘이 상생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기를 빌어본다.

/임채우 수필가·국제뇌교육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