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는 1906년 4월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인근 장연으로 갔다. 새 아버지는 환갑이 지난 늙은이였다.

여덟 살 때 의붓아버지가 보던 춘향전으로 글을 깨쳤다. 이후 삼국지, 옥루몽, 조웅전, 숙향전 등 "눈에 뜨인 소설책이라고는 기어코 독파"했다.

동네 할아버지·할머니는 이런 강경애에게 과자를 사다주면서 집에 데려와 소설을 읽혔다. 당시 별명이 '도토리 소설쟁이'였다.

열 살이 지나 형부의 도움으로 학교에 들어갔지만 학비가 늘 부족했다. 남이 다 읽은 책을 얻어 공부했다.
종이와 붓을 훔쳐 쓰기도 해 친구들이 '도적년'이라고 놀렸다. 1921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을 맞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서 국문학자인 무애 양주동(1903~1977)과 동거한 사실은 유명하다. 강경애는 와세다대 영문과 출신의 양주동과 살면서 체계적으로 문학 소양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훗날 양주동은 "18세의 여학교 4년생으로 많은 문학사상 서류를 읽었다. 나의 권고로 근대문학십강을 졸업한 그녀는 다시 근대사상십육강을 흥미있게 공부하더니 어떤 날 그녀는 책점에서 다시 자본론과 맹자를 사가지고 와서 나더러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었다. 엄청난 지식욕 탐구열이었다"고 강경애를 추억했다.

'인간문제' 원고료 200여 원을 놓고 남편 장하일과 다툰 기록도 있다. 당시 중학교 교사로 있던 남편 장하일의 월급이 30~50원이었으니 큰 돈이었다.

강경애는 원고료로 겨울 외투, 목도리, 금반지, 남편 양복을 사려 했다. 하지만 남편은 감옥에서 나와 투병하는 동지의 입원비, 생계가 어려운 동지의 가족을 위해 쓰자고 한다.

이때 남편과 크게 싸웠지만 강경애가 물러섰는데, 이 일을 동생에게 설명하며 "이 사회적 가치를 떠난 그야말로 교환가치를 향상시킴에만 몰두한다면 너는 낙오자요 퇴폐자이다"고 적었다.

강경애는 1939년 신병이 악화돼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1944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명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