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와 고려왕조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 미국의 한국사가 존 B. 던컨이 대표적이다. 그는 조선 초기 지배층의 대부분이 고려의 구 귀족 출신이었고, 두 왕조 사회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내 생각은 정반대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평범한 집안에서 많이 나왔다. 요즘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누리는 정도전(鄭道傳)은 두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의 외가와 처가는 노비였다. 그런데도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건국을 주도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평민중심, 특히 소농중심의 유교사회를 꿈꿨다. 조선은 고려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새 세상이었다. 정도전의 개혁구상이 모두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후대에도 그의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민본정치로 이름난 세종 역시 정도전의 사상적 후계자였다.

'경자유전(耕者有田)', 즉 농사짓는 사람이 논밭을 소유해야한다는 믿음. 이것이 정도전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그 당시 경제의 중심은 농업이었다.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권력자들이 백성들의 논밭을 앞 다퉈 빼앗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한 조각의 땅에도 임자가 여럿이었다. 농민이 부담할 소작료 역시 2중3중이었고, 세금의 운반비용도 무거웠다. 지주의 심부름꾼을 접대하는 비용도 많았다.

그러나 고려의 지배층은 농민의 고통을 외면했다.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임금의 할 일이다."(논어) 이런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한 정도전과는 달랐다. "공(정도전)은 그 폐단을 잘 알고, 반드시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우리 태조(이성계)를 적극 도왔다. 국내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국가 소유로 만든 다음, 인구 비례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해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할 생각이었다."(정도전, 삼봉집(三峰集)) 이성계(李成桂)가 자신의 견해를 인정하자, 정도전은 토지 개혁안을 재상회의에 제출했다(1389). 그는 조선의 왕안석이었다.

당시 구 귀족들은 머리로는 토지 개혁안을 이해했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을 반대했다. 정도전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색조차 그러했다. 학자들 중에서는 조준과 윤소종만이 개혁에 찬성했다. 결국 개혁안은 세에 밀려 좌초했다.

보통사람은 사회적 약점 때문에 보수적이 되기가 쉽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대개 양반의 서자나 아전으로서 약간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득권층에 온전히 편입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출신을 배반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달랐다. 자신의 한미한 출신을 끝내 잊지 않았던 그는, 정치의 근본을 백성의 삶에 두었다. 그는 지주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과거제와 무상교육 등 각종 개혁안을 마련했다. 기회 균등한 새 사회의 건설을 통해 다수에게 행복을 선사하고자 했다. 공리주의자라고도 불릴만한 정도전이 '왕자의 난(1398)'을 만나, 쓰러지고 만 것은 유감이었다.

떵떵거리는 오늘날의 기득권층도 정도전의 뜻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1960년대부터 한국사회는 경제성장에 모든 것을 걸었다. 국가는 대기업에 각종 혜택을 주었고, 시민들은 희생을 감내하였다. 현재의 무역대국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은 자살률이 유난히 높은데, 그들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문제가 심각하다.

그런데도 부자증세를 비롯한 경제민주화를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온 세상이 다 그런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2013년 5월, 나는 독일 공영방송에 출연한 그 나라의 고위성직자가 물질적 '재분배'야말로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국 교회에서는 언제 다시 이러한 양심의 목소리가 나올지 모르겠다.

정도전의 '경자유전'이란 주장 자체는 이미 낡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신은 여전히 새롭다. 소수의 부자들이 국토와 자본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지구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2011년 가을, 뉴욕 월가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전 세계 거대자본에 맞서 '오큐파이' 운동을 벌였다. 정도전이 추구하던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