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후 지식인들 '인천의 명물… 조선의 자랑' 목소리 높여 민족적 아픔 달래주던 공간 부각
'디스코팡팡' 새명물 된 지금… 천혜자원 활용 해수족욕탕 추진돼 옛명성 회복 기대감
일제 강점기 발표된 소설 속 인천, 특히 월미도는 '일탈과 유흥'의 장소로 그려진다. 인천은 경성에 살고 있는 청춘남녀가 기차 타고 '바람 쐬러 가는 곳', '은밀한 무언가'를 하는 장소로 툭하면 등장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광수의 '사랑', 이효석의 '주리야' 등에 나타난 인천이 그러하다. 소설은 월미도에 놀러가는 남녀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월미도를 다녀왔다는 것 만으로 둘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돼 버리고 만다. 이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조탕(潮湯)이라는 특별한 시설이 월미도에 있었기 때문인데, 호텔 앞에 바닷물을 가둬 만든 조탕에 벌거벗은 남녀가 함께 있다는 것은 '타락'과 '일탈'을 상징했다.
반면, 이같은 일탈의 이미지 너머에도 바다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갖춰진, 그 자체만으로도 휴양지의 역할을 하는 월미도도 분명 존재했다. 2014년 인천 월미도.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놀 수 있는 공간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 각종 놀이시설이 월미도를 채우고 있다.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아무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오갈 수 있는 바닷가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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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철도가 개통되고 1917년 월미도와 인천역을 연결하는 방파제가 완공된 이후 경성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인천은 당일치기 행락지로서 인기였다.
특히, 1923년 일본 자본의 '월미도유원회사'가 월미도에 만든 조탕(바닷물을 끓여 만든 일종의 목욕탕)은 그야말로 '인공낙원'이었다. 해수욕장엔 캠핑촌이 생겼고, 벚꽃놀이 인파로 월미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소식도 신문에 연일 보도됐다.
이 같은 인기와 더불어 월미도는 일제 강점기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여기서 월미도는 '쾌락', '욕망', '일탈'의 장소였다.
소설가인 주인공 구보가 하루동안 경성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내용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 구보는 경성역에서 애인과 놀러가는 듯한 동창을 만나는데, 목적지가 월미도라는 이유로 그들이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러한 시각에 (월미도로)떠나는 그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를 그곳에서 묵을 게다. 구보는 문득, 여자의 발가숭이를 아무 거리낌없이 애무할 그 남자의, 야비한 웃음으로 하여 좀더 추악해진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고, 그리고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
염상섭이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진주는 주었으나'에서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이 월미도 조탕에서 한 여성 음악가와 중년 남성이 목욕가운 차림으로 같이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둘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이 같은 이미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효석의 소설 '주리야'(1933년)에서는 월미도를 찾는 남녀의 심리가 직접 묘사된다. 집에서 정혼해 준 남자를 거부하고 경성에 숨어 지내던 주인공 주리야는 자신을 찾으러 온 오빠를 피해 사회주의자 민호와 월미도로 야반도주한다.
늦은 밤 월미도 여관에서 주리야와 한방에 묵게 된 민호는 혼란스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주리야의 몸에 손을 대고 만다.
다음 날 아침 민호는 자신의 뺨을 때리는 주리야에게 "그러면 그때까지에 마음의 유혹을 한 것은 누구요.(중략)육체적 거리가 너무도 가까웠든거요. 그것이 모든 것을 낳았소"라고 반박한다. 월미도로 자신을 이끈 것 자체가 '유혹'이었다는 얘기다.
이광수 소설 '사랑'(1938)에서 주인공 순옥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허영과 함께 조탕이 딸린 월미도의 한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다.
순옥은 단지 의사 안빈의 혈액성분 실험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허영과 월미도를 찾은 것뿐인데, 도리어 순옥과 허영이 '약혼관계'였다는 소문이 나돈다.
"아니, 저 석순옥이가 말야. 본래 약혼한 남자가 있었거든….(중략) 굳게 굳게 약혼꺼정 하고, 월미도인가 어디서 하룬가 이틀인가 같이 자기까지 했대."
작가가 피를 뽑는 기괴한 장면의 배경을 굳이 인천으로 정한 것은 월미도가 갖고 있는 육욕의 이미지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 순옥이 얻으려 했던 피의 성분은 다름아닌 '애욕'과 '욕정'의 성분이었다.
당대 월미도가 일탈과 유흥의 공간으로 그려진 것은 비단 문학작품뿐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1923년 8월 12일자 '월미도의 일야(月尾島의 一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일요일이나 제일(祭日)에는 청년 남녀가 너나 없이 살에 착 붙는 해수욕복을 입고 뒤섞이어 노는 양은 참으로 큰 작란판을 이룬다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 소설의 풍속을 연구한 김주리 한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조탕의 물은 깨끗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아니라 불결하고 뜨거운 물로써 수많은 익명의 몸이 부딪히는 공간이다"라며 "당시 문학 속 월미도가 타락한 공간의 이미지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월미도의 이러한 이미지는 당시 대표적인 상류층 휴양지였던 강원도 원산 해수욕장과 극명히 대비되는데, '사랑'에서 원산 해수욕장은 병에 걸린 안빈의 아내가 요양을 하고 매일같이 산책을 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김주리 교수는 "상류층, 외국인의 별장이 있던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원산과 달리 인천은 식민지 중산층의 무교양과 속물성, 경박함과 타락을 환기하는 공간으로 그려진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 '조선의 자랑' 월미도, 그리고 지금
행락지로서의 월미도는 인천을 넘어 당시 조선의 자랑거리였지만, 일제의 지배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일본 자본으로 만들어진 월미도 조탕에 조선인들이 열광하는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고, 월미도는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휴양지로서 역할해 왔다는 주장도 나왔다. 1926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의 '인천의 명물 월미도의 풍광'이라는 기사를 보자.
"월미도는 꽃아침 달저녁 정남정녀(情男情女)의 놀이터로만 만족하지 아니한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때때로 우국지사의 한많은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충신협객의 뜨거운 머리를 식혀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말의 김옥균 선생이 망명의 길을 밟으실제 이 월미도를 거쳤으며 여류운동가 김마리아 양이 이 월미도에 은신을 하였다가 황해를 건넌 것은 최근의 사실이어니와 기타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무명의 지사들도 아담하고 다정한 이 월미도의 위안을 얼마나 받았으랴? 월미도는 인천의 명물이다. 조선의 자랑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월미도가 경성을 끼고 있는 대규모 행락지로 개발된 건 분명하지만 지식인들은 월미도가 행락지로만 부각되는 게 싫었던 것이다"라며 "이들은 월미도가 우국지사들이 바다를 보면서 머리를 식힌, 즉 민족적인 아픔을 달래주는 공간이었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주말이었던 지난 22일 찾아간 월미도에선 더 이상 옛 월미도 조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놀이공원의 '디스코 팡팡'은 월미도의 새로운 명물이 됐고, 횟집과 식당, 카페들이 문화의거리에 줄지어 들어서 있다.
월미공원엔 가볍게 산책을 하는 중년 부부들이 많았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2년 한 해 무려 185만 명의 내외국인이 문화의거리를 찾았다고 한다.
이러한 풍경 속에 월미도 문화의거리에서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해수족욕탕 시설이 눈에 띄었다. 인천 중구가 추진하는 해수족욕탕은 오는 5월까지 월미도 문화의거리에 해수를 담아두는 대형 야외 욕탕과 무대시설을 만드는 사업이다.
월미도의 옛 명성을 되찾아 줄 것으로 기대되는 해수족욕탕 구상은 9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바다'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인공을 가미하더라도 바다라는 전제조건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수도권 한복판 월미도에서 느낄 수 있는 바닷바람과 바다 내음은 세월이 지나도 바뀔 수 없는 인천의 자랑이다.
인천발전연구원 조혜정 연구위원은 "관광지를 인공적으로 조성한다고 해도 결국 '자연'이 주는 경치를 따라가진 못한다"며 "1·8부두 내항재개발과 연계된 개항창조문화도시 사업이 추진되면 월미도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공간이 더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