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권에서 최근 수 년간 여론조사가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의사결정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어 정치권 내부의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각당의 예비후보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여론조사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당락을 가르는 결정적인 잣대기능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새정치민주연합이 기초의원 무(無)공천 당론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국민여론조사 결과를 50% 반영키로 결정, '여론조사 만능주의'가 정점을 찍은 듯한 분위기다.

특정 목적을 지닌 정치결사체의 의사결정 과정을 국민의 여론에 반쪽이나 의지하겠다는 것 자체가 정당의 존립의미를 훼손할 수 있어서다. 앞서 옛 민주당이 전당원투표를 통해 무공천을 당론으로 확정한 것은 당론 결정의 본령은 당원들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새정치연합은 광역단체장 후보를 뽑기 위한 4가지 경선안 가운데 3가지 방안에 국민여론조사를 필수요소인양 끼워넣었으며, 이중 하나로 여론조사 결과만 100% 반영해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까지 포함했다. 여론조사 의존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방증이다.

새누리당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지사 후보선출을 100%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 하기로 했다. 일부 예비후보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됐으나, 이른바 본선경쟁력을 위해서라면 여론조사만을 통한 후보선출도 예외로 인정됐다.

또 새누리당 경기지사 후보를 가리는 당내 경선에서 남경필 의원에 맞서기 위해원유철 정병국 의원과 김영선 전 의원이 당에 공식적으로 요청한 방법도 여론조사였다.

후보들이 자발적으로 교통정리를 하지 않고, 여론조사를 통해서 가려달라고 나선 흔치 않은 사례다. 그만큼 여론조사가 정치인들한테 부지불식간에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판관'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됐다. 실제 원유철 의원과 김영선 전 의원은 여론조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의 뿌리를 굳이 찾는다면 여론조사 결과로 판가름난 지난 2002년 대선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를 들 수 있다.

바로 지난 대선 기간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당시에도 설문 문항 이견 탓에 결정을 내지는 못했지만 양측이 여론조사를 추진한 바 있다.

19대 총선 야권 단일후보 경선 당시에도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여론조사를거쳐 출마지역을 정리했다.

정치권이 이처럼 여론조사를 민심의 흐름을 들여다보는 참고자료가 아닌 정치적결정 수단이나 컷오프의 기준으로 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9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여론조사는 하나의 참고 자료일 뿐, 결정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며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현상은 선거가 임박해 어떻게든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졸속주의'"라고 비판했다.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여론조사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관행이 굳어지는 것을 두고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경기도 후보 압축 과정에서도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최대 50%로 제한하고 당 공헌도 등을 병행해 평가했어야 한다"며 "모든 것을 여론조사화 한다면 리더십 부재를 국민에게 떠넘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론조사 외에 현실적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반론도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은 "공론조사나 배심원제의 경우 선거인단을 상향식으로 선정하면 사람을 많이 모을수록 유리하고 하향식으로 선정하면 선거인단 명단을 입수해 결과를 조작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공정성만 담보되면 여론조사만큼 편리한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방식, 조사대상, 설문 구성 등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론조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정치적 편의주의에 다름 아니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김형준 교수는 "(여론조사 의존 현상은) '밀실 공심위' 구성처럼 공천 제도가 왜곡돼 나타난다"며 "미국처럼 코커스(당원대회)를 채택하든지 선거법을 바꿔 선거 3개월 전까지 후보를 확정하게 하는 등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정치권이 대화와 타협, 조정능력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채 큰일에 닥쳐서 서둘러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가장 편리한 도구로 여론조사를 오·남용하고 있다는 비판인 셈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