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기업에 기계 부품을 납품하는 D사의 사장 최모(46)씨는 지난 연말, 송년 인사치레로만 1천만원이 넘는 돈을 썼다. 백화점 상품권과 현금 등 적게는 3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건네줄 대상에 따라 '격'을 달리하며 나름대로 알뜰하게 봉투를 준비했지만 워낙 챙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봉에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푼돈이나마 보너스라도 지급할 수 있는 돈, 하지만 최씨에게는 회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대기업 담당직원과 간부, 거래처에 성의표시를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문제였다.
“은근히 눈치를 보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 합니까. 1년동안 업체를 돌봐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보지만 솔직히 살아남기 위한 보험금인 셈이지요.”
우리 사회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에게 떡값이나 휴가비, 골프접대는 이미 당연한 관례가 된지 오래다.
직접적인 거래를 놓고 큰 액수를 주고받다 탈이 나면 '뇌물'이 되지만 최씨처럼 틈틈이 찔러주는 촌지(寸志)는 어느새 '사람사는 정'으로 치부된다. 품질과 가격, 신뢰가 기업간 거래의 원칙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대부분의 중소업자들은 이 원칙 앞에 코웃음을 친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게이트'가 등장해도 재수가 없는 경우이거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드물게 '양심선언'으로 사단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상대방의 '계약위반'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당사자는 동종업계에서 두번 다시 일할 의사가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상식이다.
지난 한햇동안 뇌물수수와 직권남용 등으로 경찰에 적발된 부정부패 사범만 5천645명에 달하고 이중 1천226명이 구속됐다. 구속자중에는 뇌물수수 등의 비리공직자 157명과 탈세 및 재산도피 행위를 한 사회지도층 인사 32명, 공사발주 및 물품조달을 둘러싼 금품수수와 예산전용등 불법행위를 저지른 공기업 및 정부투자기관 임직원 31명이 포함돼 있다.
겨우 IMF 위기에서 벗어나 너나 할 것없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부르짖고 있는 이면에는 '지름길 놔두고 굳이 먼길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그들만의 원칙이 통용된다. 칼자루를 쥔쪽에서 바라니까 줄 수밖에 없다지만 한쪽 손만으로는 박수를 칠 수가 없다. 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한 '보험금'
입력 2002-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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