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그러니까 1995년 4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베이징에 주재하는 한국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정치권ㆍ정부ㆍ기업이 모두 잘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예를 들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 대한민국 최대 그룹 총수가 겁없이 정부와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한 이 말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2년전 대선에서 현대 정주영 회장과 대권을 다투었던 김영삼 대통령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이 회장의 말을 정치에 도전하는 거대한 경제권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말 한번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국민과는 달리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정곡을 찔린 청와대와 정치권은 발끈했다. 특히 김영삼 정부는 당시 끊임없이 터지는 대형사고로 인해 깊은 상심에 빠져 있었다.

1993년 3월 78명이 사망한 '구포역 무궁화호 전복사고', 그해 7월 68명이 사망한 '아시아나 733편 목포 추락사고', 10월 292명이 사망한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94년 10월 32명이 사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잇달아 터졌다. 이 회장 발언이 있던 95년 4월에도 101명이 사망한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두달 후 6월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문민정권은 치명적인 결정타를 맞았다. 그리고 97년 8월 228명이 사망한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가 일어났다. 이 회장 발언 이후 삼성은 발언 배경과 진의를 해명하느라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이 회장의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의 발언은 그후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수준을 이야기할 때 자주 오르내리는 '명언'이 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사고 앞에서 할 말을 잃은 국민은 지금 깊은 슬픔에 잠겨있다. 하지만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20년 전 이 회장이 '3류 정부 4류 정치'라고 일갈했던 그때와 지금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게 있다면 언론이 하나 더 추가된 정도다.

이번 사고로 3류로 전락한 정부는 스스로 '무정부 상태'를 연출했다. 컨트롤타워는 붕괴됐고 대책본부와 해경, 해군, 해양수산부가 제각각 따로따로 움직이고 있다. 어디 이 뿐인가. 시신안치소를 방문한 해양수산부 장관을 동행한 공무원은 "기념사진을 찍자"고 말했다가 유가족의 분노를 사고 결국 사표를 냈다. 교육부 장관은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컵라면을 먹다 구설수에 올랐다. 먹는 게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모두 울고 있는데 혼자 컵라면을 먹고 있는 장관을 상상해 보라. 3류라는 말조차 과분할 정도다.

정치권도 다를 게 없다. 사고 초기 사고 현장을 찾아 사진을 찍으려던 정치인들은 여론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트위터에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자작시를 올렸다가 망신을 자초하거나, 해경 경비정을 타고 현장을 방문했다가 "국회의원직이라는 특권으로 실종자 가족은 타지 못한 경비정을 탔다"는 논란에 시달린 정치인도 있었다. 그 와중에 당의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폭탄주를 마신 여권 시장 후보, "(구조가 더딘 것) 이 정도면 범죄 아닐까"라고 트위터에 글을 올린 야당 초선의원에게는 고생하는 잠수부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며 혹독한 비난이 쏟아졌다.

언론의 '추락한 품격'은 더 큰 문제였다. 4개의 지상파 방송, 4개의 종편방송, 2개의 뉴스전문채널에서 경쟁하듯 쏟아내는 뉴스로 국민들은 넋이 빠져 있다. 한 종편방송 진행자는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의 죽음을 묻다가 여론의 질타를 당했고, 또 한 종편방송은 민간 잠수부라는 신분이 불분명한 여성을 생중계로 연결했다가 보도국장이 공식 사과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방송사간의 경쟁이 나은 비극이었다. 이번 사고에서 언론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컸던지 취재기자가 유가족에게 폭행을 당하는가 하면 마침내 유가족들이 언론 보도 자제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20년 전 문민정부와 정치권이 한 기업인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고 3류를 1류로 바꾸려는 노력을 했다면 세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정권이 네번 바뀌었다. 이 회장의 삼성은 지금 세계 최고의 기업이, 대한민국은 IT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는 여전히 3류에 머물러 있고, 대형 참사는 계속 터지고 있으며 그로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고 있다.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