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띠 해 여아(女兒) 출산 기피현상은 옛말이 됐다. 예전엔 '말띠 해에 태어난 여자들이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에 따라 출산을 기피하는 경우가 제법 됐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엔 그런 속설에 구애받는 부부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두살배기 딸 아이를 둔 주부 배모(30)씨는 요즘 마음이 불안하다. 임신 2개월 째 접어들었는 데 시부모가 뱃속의 아기가 딸인지 아들인지를 무척 궁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시부모는 아들이라면 몰라도 만약에 딸이라면 낳아선 안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시부모의 등쌀에 배씨는 어쩔 수 없이 성감별해주는 산부인과를 여기저기 수소문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성감별이 불법인 것은 물론 알려주는 곳도 없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다. 미신에 대한 믿음이 유난스러울 정도인 시어머니와 용하다는 '족집게 점집'도 이 곳 저 곳 다녀봤지만 저마다 말들이 달라 시어머니도 정확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딸로 판명될 경우엔 낙태를 해야할 판이다.
배씨가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에 까지 몰린 것은 ‘말띠 딸은 팔자가 드세기 때문에 올 해엔 딸을 낳으면 안된다’는 속설 탓이다. 배씨의 경우와 같이 말띠 해에 딸 낳기를 주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의 경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어느 산부인과 병원을 가나 임신부들 사이에서 말띠 해에 딸을 낳는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황병철(53) 길병원 모자병원 소장은 “예년엔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하는 경우가 모자병원 전체 분만 건수의 50% 이상을 차지했으나 최근엔 45% 정도로 줄어들었다”면서 “아이를 갖는 요즘 부부들 사이에서는 말띠 해에 딸을 낳지 않는다든지 하는 속설을 따르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동이(29·여) 서울여성병원 상담실장도 “연말부터 음력 설을 앞둔 지금까지를 놓고 볼 때 분만율이 줄었거나 조기출산을 위한 제왕절개 수술이 늘지 않았다”면서 말띠 해와 관련한 속설을 신세대 부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역술인들도 이런 속설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역술인 김모(57)씨는 “일부에서 아직도 말띠 딸이 팔자가 드세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속설에 불과하고 역학상으로도 전혀 근거가 없다”면서 “평생 운수를 나타내는 사주란 것이 생년월일시를 종합적으로 따져보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띠만 갖고는 팔자를 얘기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말띠 해와 관계없이 아이를 갖는 것이 새로운 풍속도가 되고 있는 것. 이 같은 새로운 출산 풍속은 잘못된 속설을 믿지 않는 젊은 층의 합리적인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또 말띠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나 스포츠계에 뛰어난 말띠 선수들이 많다.
남자축구보다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우리나라 여자축구의 간판팀 INI스틸의 주전 선수 박윤정(24)도 말띠다. 올 해로 축구인생 10년째를 맞는 박 선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INI에 입단, 한국 여자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세계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일조했다.
미여자프로골프(LPGA)계에도 주목받는 한국의 '말띠 처녀'가 있다. 한희원(휠라코리아) 선수. 지난 해 LPGA 투어에서 한국선수로는 사상 세번째 신인왕에 오른 한희원은 또 세계 최초로 미국과 일본 투어에서 모두 신인왕을 차지하는 기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신인왕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우승컵을 한 차례도 차지하지 못했고 '톱 10' 진입도 두 차례밖에 없었지만 풀시드를 획득한 올 시즌에는 꼭 첫 우승을 거머쥐어 말띠 해에 '말띠 처녀'의 돌풍을 일으킨다는 각오다.
올 2002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승, 아시안게임 5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려는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에도 '말띠'가 주축이다. 오른쪽 윙을 맡고 있는 장소희 선수. 164㎝, 57㎏의 작은 체구지만 전광석화같은 속공과 뛰어난 체공력에서 나오는 스카이슛은 우리 대표팀의 주무기가 됐다.
속설을 뒤엎고 자랑스런 한국 '말띠 낭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스포츠 스타들의 활약에 따라 앞으로는 저마다 '말띠 해에 딸을 낳아야 한다'는 새로운 '속설'이 생겨날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