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규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장
승객들에 등돌린 세월호 선장
탈출후 자신의 행위
반성·후회한들 소용없어
배가 기울기 시작하던 순간
책임 다했다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다

책임이라는 말에는 오래된 시커먼 벙커시유 기름 냄새가 난다. 한물간 코미디언 얼굴처럼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나눔, 행복, 평화 같은 말들에 압도적으로 밀려나 책임은 진즉 물살 센 바다 한 쪽에 깊이 잠수해버렸다. 소통이며 융합 같이 우리네 삶을 이끌어주던 세련된 근대성 속에서 소리 한번 제대로 못 지르고 사라져 버렸다.

세월호 사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승객들을 놔두고 먼저 내린 그 사람, 3등 항해사, 그리고 해경과의 그 미련스럽게 반복되던 무전기 속의 음성, 한 개만 열린 구명정, 기념촬영, 컵라면, 그리고 그 18년이 넘었다는 일본 배.

우리 모두는 책임을 말한다. 기술적인 문제나 행정의 미숙함, 느린 구조 방식을 두고 분노한다. 전문성 뒤에 가려져 있던 책임을 끄집어내 한 개인의 실종된 도덕규범을 말하고 일처리에 있어 직무유기를 말한다. 수준 높은 책임의식의 부재와 용기 없음, 비겁함에 대해 말한다. 대한민국에 갑작스럽게 책임의 시대가 온 듯하다.

이렇게 물어보자. 책임이 그저 한 고매한 인격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지는 것이었던가. 그런 의미라면 우리는 더 이상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그런 대단한 도덕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책임은 벌써 법적으로 전용되고 조정된 지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한때 '책임의 시대'라는 진중했던 분위기를 떠나 그 소유권을 법률적 의식에 넘겨줘 버렸다. 지금 어느 곳에서 그 단순한 만큼이나 소박한 책임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가슴을 열고 받아주고 있는가.

우리가 조우한 세월호의 전말은 이렇다. 선장은 승객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탈출했다는 것, 기념촬영이나 라면 식사에 한순간 유가족들의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 힘들고 지친 타인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없었고 그들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없었다는 것이다. 책임은 내가 마음을 다잡으며 능동적으로 대처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저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얼굴을 들여다보는 데에서 시작했어야 했다. 책임은 탈출 후,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후회하며 유감을 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책임은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것이 아니다. 책임에는 그럴 여유가 없다. 이리저리 재면서 할 일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책임은 배에 남아 방송 마이크를 붙잡고 있던 여승무원의 것이었고, 구명조끼를 하나라도 더 입히려고 동분서주했던 한 교사의 것이었다. 또한 책임은 선실 안에 남아있던 승객들의 두렵고 공포에 젖은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다 함께 갇혀버린 그 어떤 사람의 것이었다. 자기 주위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을 챙기다 일어나는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누가 책임을 그렇게도 평화롭게 얘기하고 있는가. 뒤에 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등을 돌린 사람은 책임을 논할 자격이 없다. 학생들 사이를 얼굴을 돌리고 스쳐 지나간 사람, 한참을 생각해본 뒤 느껴지는 책임은 책임이 아니다. 책임은 순간 저절로 일어나 그 얼굴을 보고 지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며 책임을 느낀다고 하면 이미 늦다. 책임의 시효가 지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책임이라는 말만을 알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은 온몸이 물에 젖었을 때 진가를 발휘하지 물기가 마르고 담요를 두르고 나면 이미 책임이 아닌 것이다.

세월호가 바다에 진 후 세상은 온통 압수수색, 부실 수사로 떠들썩하지만 이것은 책임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기도, 분향, 애도, 추모도 책임의 의례가 아니다. 기적을 바라고 슬픔에 젖는 것도 책임이 아니다. 책임은 재난이나 비극이 종료된 후에 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배의 아이들에게 져야 했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한숨처럼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던 그 때의 책임이 진짜 책임이었고 그런 책임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다. 책임은 아이들과 함께 실종되어 버렸는데 남은 우리는 한가롭게 도의적 법적 책임을 얘기하고 있다. 저 배를 인양한들 그 때 한번 밖에 기회가 없었던 책임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책임의 시대가 온 듯해도 책임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수상한 사월이다.

/박연규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