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배 시인
오늘, 이 땅은 분노와 원망
비탄에 잠겼는데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문제다
수백년 누워 있는 그가
어찌 지금의 슬픔과 노여움을
짐작하겠는가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가슴에 닿는 날이다. 고통의 바다를 힘겹게 헤엄쳐 건너는 일이 사는 일이라는 뜻일 게다. 누구나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산다. 슬픔이 지극하면 울음조차 터지지 않는다.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은 희디흰 영산홍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사람의 깊은 슬픔을 알아 유난히 희게 피어있는 꽃이라는 생각이 가슴을 덮었다.

연휴의 시작이어서 그런지 광주에서 양평으로 빠지는 국도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퇴촌면으로 들어서면서 남한강의 상수원지가 나타났다. 물빛은 청람하여 깊고 아름답고 서럽다. 늦은 봄날, 산하는 연초록의 세상이다. 싱그러움이 넘치는 계곡을 지나 남한강을 건너 길은 새로운 길을 맞고 보내며 달려나간다. 흰 영산홍이 깊고 깊은 슬픔의 색깔이었다면 지금 지나고 있는 싱그러운 연초록은 슬픔과는 아무 상관 없는 색깔이어서 잠시 혼란스럽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슬픔과 기쁨을, 절망과 희망을, 좌절과 극복을, 분노와 용서를 함께 건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처럼 절망하고 희망하는 일로 점철되었던 인물이 상촌 신흠이다. 그는 1566년(명종 21년) 1월 28일 한성부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신흠이 7세 되던 1572년 4월에 송도에서 어머니가 41세에 돌아가시고 넉달 뒤인 그 해 8월에 아버지 또한 42세로 임지 송도에서 타계했다. 천애의 고아가 된 그는 어린 동생과 함께 외조부모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7세부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를 때까지 10여 년간의 청소년기를 충남 대덕군 동면 주산리(현 대전시 동구 주산동)에서 보냈다.

상촌 신흠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꼽힌다. 1586년 (선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거쳐 1627년(인조 5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관직생활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613년부터 4년간 파직되어 김포로 방귀전리 되었다가 인목대비의 유폐의 주범으로 몰려 1617년 춘천으로 유배되어 4년을 보낸다. 1623년 계해정변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복권되어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중용된다.

그의 문학세계는 파직과 유배의 고통스러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상촌집(象村集)은 한국 고전문학의 빛나는 업적으로 폭넓은 문학적 사유를 펼쳐보인 역작이다. 상촌집에 수록되어 있는 수백편의 시편들과 산문 속에 끼여 있는, 야언(野言)은 그의 인품과 철학적 인식의 깊이를 짐작케 하는 명상록이며 잠언이다.

'중인을 보는 요령은 큰 대목에서 나대지 않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데 있고, 호걸을 보는 요령은 작은 대목을 빠뜨리지는 않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데에 있다. 음성과 안색을 꾸미기를 좋아하면 허겁병에 걸리고, 재물과 이익에 빠지면 탐도병에 걸리고, 공과 업적만을 추구하면 주작병에 걸리고, 명예만을 생각하면 교격병에 걸리고, 옛 학문에만 관심을 쏟으면 호로만을 그리는 병에 걸린다'고 설파한 신흠이다.

그런가 하면 '안으로 마음을 살피면 마음도 그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고, 밖으로 형체를 살피면 형체도 그 형체라고 할 것이 없고, 영원한 시간의 지평 위에서 물체를 살피면 물체도 그 물체라고 할 것이 없다'라는 그의 인식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고뇌의 산물일 것이다. 신흠의 시조는 격조와 서정으로 울림이 크다. 그가 남긴 시조 30여 수는 유배지의 그의 생활과 관련성이 깊다. 유배지의 생활은 외롭고 쓸쓸하고 분하고 억울하고 절망하고 분노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감정을 다스려 평정심을 유지하고 사물의 본질을 탐색하고 삶의 이치를 궁구하며 쓰여진 시편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감동으로 읽힌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닐러 다 못닐러 불러나 푸돗단가/진실로 플릴 거시면은 나도 불러 보리라'는 시편 속에는 그의 분노와 원망을 노래로 혹은 시편으로 승화시키려는 고졸한 마음이 보인다.

오늘, 이 땅은 분노와 원망과 비탄으로 차 있다.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가 문제다. 정치 권력인가, 국가적 제도인가, 사회적 온정인가, 그것들이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결국 한 개인이 혼신으로 슬픔과 원망과 분노를 딛고 일어서는 용기가 충분조건일 것이다.

어렵게 찾아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산 12의1, 신흠의 묘역에서 바라본 전경은 그윽하고 평화롭다. 수 백 년 누워 있는 그가 어찌 오늘의 슬픔과 원망과 분노를 짐작하겠는가.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