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진구 인천재능대 교수
상처 준 사람은 기억 못하는데
받은 사람은 계속 괴로워 하고
증오심만 키우게 된다
억울한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래야 그 공간에 다른것을
채울 수 있고 전진할 수 있다


모 방송국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인생의 길을 찾고 싶은 시청자를 공모해서 세 명의 멘티를 선발했습니다. 저는 그 멘티들에게 강의와 대화를 통해서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새로운 인생길을 안내하는 멘토로 참여했습니다. 30일 동안 800㎞를 걸어야 하는 험하고 먼 길이라서 온갖 것을 배낭에 넣었습니다. 침낭, 옷, 양말, 책, 세면도구, 반창고 100개, 파스, 통증 약, 감기약 등. 길을 걸으면서 바리바리 짊어지고 간 배낭 때문에 '이러다간 내가 죽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낭에 지고간 물건들을 하나 둘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비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멘티 중에 58년생 어머님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중국 유학 갔다가 그 곳에서 공부를 잘해서 칭다오의 한 회사에 취직을 했던 딸은 25살의 재기 발랄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도에 의해 중국에서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 어머님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순례길에 참여한 것입니다. 가장 심한 아픔을 안고 참여한 어머님을 대상으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님도 저처럼 배낭에 있던 물건을 계속 버리시더군요. 왜 버리셨어요?" "무거워서 그랬어요. 너무 무거우면 끝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버렸어요." "그렇습니다. 배낭이 무거우면 멀리 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무거우면 멀리 갈 수 없어요. 내려 놓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복수심과 분노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따님이 들어올 수 있어요. 증오를 비워야 사랑이 들어옵니다. 범인을 위해서 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따님을 위해서 비우라는 겁니다."

어머님은 강의를 듣다가 울면서 뛰쳐나갔고 녹화는 중단되었죠. 그 분과 저는 30일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분은 피를 토하듯 자신의 인생에 관한 아픔을 토해내면서 울고, 저는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눈물과 성찰의 길이었습니다.

순례길을 완주한 마지막 날 개인별 인터뷰를 하는 날이 왔습니다. 그 어머님은 "처음부터 송교수님이 나보고 계속 내려놓아라, 비우라고 했는데, 저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떻게 비워요.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보니 절반 정도를 내려 놓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합니다. 비워놓은 공간으로 사랑하는 딸이 들어와 있는 것이 느껴지고, 그 딸과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웃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그 쓰리고 아픈 상처를 쉽게 잊지 못합니다. 마치 잊어서는 안 되는 사진이 담긴 오래된 앨범처럼 간직하고 매일 매 순간 꺼내 들여다 보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상처와 아픔을 키우죠. 그런데 상처와 아픔은 특이한 특징이 있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받은 사람만 기억한다는 사실입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아픔을 지속적으로 재생시키면서 매일 칼끝으로 그 상처를 찌릅니다. 결국 상처받은 나만 계속 더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시간이 경과할수록 삶은 더욱 피폐해지죠.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비워야 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도 못하는데 받은 나만 혼자서 계속 아파야 하는 이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행위를 멈추고 비워야 합니다. 비워야 그 공간에 다른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증오의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죠. 마음속 어느 지점에서 분노의 닻을 내린 사람은 일상생활을 지속하기 힘든 상태가 되고, 자신의 영혼마저 파멸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이제 그 마음의 닻을 끊어내야 합니다. 바람과 해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아픔의 바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배낭이 무거우면 멀리 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무거우면 멀리 가지 못합니다. 먼 길을 가려거든, 원하는 길을 가려거든 비워야 합니다. 비워야 멀리 갑니다.

/송진구 인천재능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