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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장 당선자 유정복, 그는 누구인가?]달동네소년, 고향 수장으로 "취임 곧바로 국비 확보" |
군수·구청장·시장을 모두 지낸 '행정의 달인'
박대통령 핵심 측근 장관·의원직 내놓고 출마
중앙인맥 탄탄 인수위 대신 '국비확보팀' 운영
유정복 인천시장 당선자는 1957년 6월 인천시 동구 송림동 182 '달동네'에서 4남3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송림초등학교, 선인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왔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초중고 시절, 유정복 당선자는 공부를 잘하고 축구 등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학업 성적은 상위권에 속했고, 축구를 좋아해 '유세비오'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유정복 당선자는 어릴 때부터 외교관의 꿈을 키워 왔지만, 대학생 때 "국가를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다"며 공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대학교 3학년 때 행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2차 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강원도청으로 발령받은 지 2개월 만에 학사장교(1기)를 지원, 최전방인 강원도 양구군에서 3년 3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쳤다.
그는 강원도청으로 복직했다 1987년 내무부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내무부 지방자치기획단에서 지방자치법 제정 업무를 했으며, 내무부 장관 비서관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그가 모셨던 내무부 장관은 이한동 전 국무총리로, 이때 맺어진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내무부 교부세계장, 교육고시계장, 인사계장, 경기도 기획관을 거쳐 1994년 김포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36살의 나이로 최연소 군수가 된 것이다.
37살 때 인천 서구청장으로 일하다 민선 김포군수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그는 여당과 야당 후보인 2위와 3위의 표를 합한 것보다 많은 표를 얻으며 당선된다. 1998년에는 약 64%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그는 당시 김포군이 시(市)로 승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2002년 김포시장 3선에 실패했지만, 2004년 17대 총선에서 김포지역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후 18대와 19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됐다.
2004년에는 국정감사 우수 의원, 2005년엔 의정활동 우수 의원으로 선정되는 등 초선 의원 시절부터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였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핵심 측근으로 꼽힌다. 국회의원 시절에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2005년 11월, 초선 의원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이후 그는 박근혜 대통령 경선 후보 비서실장(2007년), 박근혜 대선 후보 직능총괄본부장(2012년),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부위원장(2013년) 등을 지낸다. 직능총괄본부장으로 있으면서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의 2010년 8·8 개각에서 그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 임명됐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초대 안전행정부 장관을 지냈다.
유 당선자는 안행부 장관직과 국회의원직을 내놓으며 올 3월 초 인천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이학재 의원의 출마 포기를 이끌어 내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서 안상수 전 인천시장에 압승했다. 그리고 재선에 도전한 새정치민주연합 송영길 후보를 누르고 인천시장에 당선됐다.
유 당선자는 밑바닥부터 행정 경험을 쌓아 군수·구청장·시장을 모두 지낸 '행정의 달인'으로 평가된다. 신중하고 일 처리가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번의 장관, 세 번의 국회의원을 지낸 덕에 중앙부처에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게 그의 강점이다.
유정복 당선자는 ▲인천 KTX시대 개막 ▲경인고속도로 지하화 ▲제3연륙교 조기 착공 ▲교육예산 10% 책정 ▲재개발·재건축 매몰비용 지원 ▲인천아시안게임 성공 개최 등을 공약했다. 또 인수위원회를 구성하지 않는 대신 '국비확보팀'을 운영해 취임 초기부터 국비 확보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는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의 한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