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규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장
정부가 책임규모 크게 잡는건
사안을 정확하게
해결하려는 자세도 아니며
어떤 면에선 주제 넘는 일 될수도
이젠 시민들도 참여의식 갖고
문제 해결에 적극 동참해야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정부만으로는 안 되며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자주 이런 두 가지 축의 하나를 쉽게 망각한다. 국가 단위의 정부이든 지자체 단위의 정부이든 정부는 그 자체 한계가 있고 나머지 일의 많은 부분은 시민들의 몫이다. 공무원들조차도 자신들의 역할이 무한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정부 역할의 쏠림 현상이 지나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지금까지 보면 이러한 쏠림 현상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번 참사의 원인과 대처 방식의 잘못을 정부 탓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정부도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내가 만난 관련 기관 지자체 공무원들도 죄인이 된 듯한 모습으로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번 일로 정부의 책임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책임이 국가개조 수준으로 격상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부에서 국가개조를 들고 나왔을 때 가졌던 불안한 감정은 문제 해결을 자신들의 몫으로 가져가려는 태도 때문이었다. 언뜻 들으면 정부가 책임을 깊이 느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려는 의지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위험한 발상은 없다. 지금이 국가 중심의 계몽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시점에서 국민이나 시민의식의 실종만큼 비효율적인 것은 없다. 민주국가의 두 축은 정부와 시민인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시민 한 축이 현저히 약화되어 있다.

국가개조라는 말은 다른 맥락에서도 적절하지 않다. 책임의 폭을 너무 크게 잡아 일종의 물 타기를 하여 일을 흐지부지 만들기 때문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가 시민의 의식이나 정체성을 몽땅 가져가 주도하고자 하는 데 있다. 누구는 국가개조를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무능, 무책임의 개조라고 하지만 이 생각에는 정부의 시민들의 의식 개조까지 덧붙여져 있을 수 있다. 국가개조라는 말이 마음 편안하게 들리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부가 절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정부가 자기 할 일을 아무리 다 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정부가 책임의 규모를 너무 크게 잡는 것은 사안을 정확하게 해결하려는 자세도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주제넘은 일이다. 정부와 시민들이 문제 원인에 대한 책임을 나누게할 수 있어야 한다. 송호근은 그의 책 '시민의 탄생'에서 시민의 탄생을 개인의 출현으로 보며 그러한 개인의 특성을 자율이라는 인문적 자원으로 규정한다. '시민과학자로 살다'의 저자인 일본의 타카기 진자부로오는 원자력 발전 증축과 같은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조차 시민들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개조와 같은 정치 슬로건으로 해결책을 정부가 다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과욕이다. 정부는 자신이 책임질 만큼의 몫만 가져가면 된다.

'정부나 기관이 책임을 진다'는 말도 공허하고 무책임할 수 있다. 책임은 본래 사람이 지는 것이다. 시스템이나 기관이 책임을 진다는 말을 못할 것은 없지만 사실적인 표현은 아니다. 책임을 이렇게 의인화시키면 책임의 소재를 따질 수가 없게 된다. 책임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책임의 주체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진다'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 소재를 묻기 위해 선장이나 업주, 해운 관계자들을 문책하는 것은 옳다. 해양수산부 해체 정도는 이번 참사의 비극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좋은 정부는 시민들의 역할과 몫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번 일로 이 정부가 기관장에 시민 참여 배분을 지정한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잘된 일이다. 다만 국가개조는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국가개조라는 말로 시민들이 정부만을 바라보게 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가져야 할 문제 해결의 권한이나 책임까지도 정부 몫으로 가져가는 것만큼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은 없다. 세월호를 계기로 우리 시민들이 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 생겨났다고 한다면 사회 문제를 정부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착시 효과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데 있다. 시민의 참여의식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절실할 때가 없다.

/박연규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