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쯤 되면 아! 하고 이마를 탁 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사람은 꼰대소리쯤 들어도 될 법하다. 1999년 개봉된 영화 그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의 줄거리다. 한 여자를 두 남자가 공유한다는 설정이 우리 정서에 불편하지만 영화는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으며 작품성도 인정받고 있다.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꺼내는 것은 방학을 틈타 헝가리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방문 일정중 어느 하루,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영화속에 등장하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레스토랑은 부다페스트 도심 외곽 동물원 옆에 있었다. 고풍스러운 현관에는 교황·영국여왕·반기문총장 등 세계 저명인사가 다녀갔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순간 영화속의 한 여자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저마다의 인간관계에 빠져들었다. 영화는 무엇이 인간의 영혼을 무너뜨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지독하고 오래 가는지를 생각게 한다. 동시에 영화는 인간의 변신과 집념, 광기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더불어 인간이 가지는 최소한의 도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약한 피아니스트는 권력자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고, 부유하지만 무기력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두고 운명에 순응한 채 가스실로 간다. 여자는 몸을 던져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구하려 하지만 도로에 그치고, 광기에 휩싸인 남자는 생명의 은인마저 가스실로 보내는 것으로 인간의 도리를 배반한다. 이런 장면은 우리게도 낯설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에 따라 배신하고 낯을 바꾼다. 믿음과 신뢰,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하루가 다르게 빛바래져 가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지금까지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말 중의 하나는 의리다. 잔혹한 폭력영화라고 몸서리치면서도 느와르 영화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의리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훨씬 강력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의리라는 말은 본래의 말보다는 패거리 정서 정도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의리없는 놈'이란 말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건달들이 주고받던 '의리'는 원래는 인간의 참된 도리를 의미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나는 의리없는 한국 사회를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다. 의를 위해 목숨까지 던지는 극단적인 태도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조차 없는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의리없는 시대에 나 홀로 의리를 외치는 한물간 한 남자가 뜬금없이 '으리으리하게' 보이는 것이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