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전, 무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고급 레스토랑이다. 종업원 여자가 있다. 팜므파탈 형이다. 주인 남자 A가 그녀를 사랑했다. 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 B도 그녀를 사랑했다. 여자는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다. 남자 A는 남자 B와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 말한다. "당신을 잃느니 반쪽이라도 갖겠어." 같이 사랑해도 좋다는 의미다. "놓치기보다는 반만이라고 갖는 것이 낫겠다"는 대사는 한동안 회자된다. 얼마 뒤 또 한 남자 C가 등장한다. 여행 온 독일인이다. 여자에게 구애했으나 거절당하자 검푸른 다뉴브강에 투신한다. 뒤따라간 남자 A가 건져낸다. 전쟁이 일어났다. 남자 C는 점령군 독일군의 고급 장교로 등장한다. 엄청난 권력자다. 피아니스트 남자 B는 권력자로 돌아와 다시 여자를 욕망하는 그를 보고 좌절해 자살한다. 남자 C는 생명의 은인인 남자 A를 가스실로 보낸다. 남자 A를 구해준다는 말에 여자는 남자 C에게 몸을 허락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훌륭한 사업가로 변신한 남자 C가 추억속에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다. 늘 찾던 비프 롤을 먹던 그는 목을 움켜쥐고 죽는다. 독살이다. 이어 백발의 한 여자가 샴페인을 치켜들며 행복해한다. 수십 년을 기다려 온 복수에 성공한 것이다.

이쯤 되면 아! 하고 이마를 탁 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는 사람은 꼰대소리쯤 들어도 될 법하다. 1999년 개봉된 영화 그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의 줄거리다. 한 여자를 두 남자가 공유한다는 설정이 우리 정서에 불편하지만 영화는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으며 작품성도 인정받고 있다.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꺼내는 것은 방학을 틈타 헝가리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방문 일정중 어느 하루,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영화속에 등장하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레스토랑은 부다페스트 도심 외곽 동물원 옆에 있었다. 고풍스러운 현관에는 교황·영국여왕·반기문총장 등 세계 저명인사가 다녀갔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순간 영화속의 한 여자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저마다의 인간관계에 빠져들었다. 영화는 무엇이 인간의 영혼을 무너뜨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지독하고 오래 가는지를 생각게 한다. 동시에 영화는 인간의 변신과 집념, 광기에 대한 극심한 공포와 더불어 인간이 가지는 최소한의 도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약한 피아니스트는 권력자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고, 부유하지만 무기력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두고 운명에 순응한 채 가스실로 간다. 여자는 몸을 던져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구하려 하지만 도로에 그치고, 광기에 휩싸인 남자는 생명의 은인마저 가스실로 보내는 것으로 인간의 도리를 배반한다. 이런 장면은 우리게도 낯설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에 따라 배신하고 낯을 바꾼다. 믿음과 신뢰,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하루가 다르게 빛바래져 가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지금까지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말 중의 하나는 의리다. 잔혹한 폭력영화라고 몸서리치면서도 느와르 영화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의리가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훨씬 강력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의리라는 말은 본래의 말보다는 패거리 정서 정도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의리없는 놈'이란 말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건달들이 주고받던 '의리'는 원래는 인간의 참된 도리를 의미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나는 의리없는 한국 사회를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다. 의를 위해 목숨까지 던지는 극단적인 태도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조차 없는 우울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의리없는 시대에 나 홀로 의리를 외치는 한물간 한 남자가 뜬금없이 '으리으리하게' 보이는 것이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언론학)